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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일 수요일

大高句麗帝國 兵馬都元帥 姜以式 大模達 高&隋戰爭 勝戰史(고구려 강이식장군)



 *진주강씨(晋州姜氏)의 동방시조(始祖) 



필자의 동방시조 대고구려제국 대모달 강이식장군의 고수전쟁사






고구려 강이식 대모달(병마도원수) 고,수전쟁

高句麗 姜以式 大模達(兵馬都元帥) 高,隋戰爭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선조들께서 쌓으신 어진 덕과 빛나는
공적[功積]의 결과임을 아무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멀리 고구려[高句麗] 시대 구국공신이신 병마도원수공 휘
이식장군[以式將軍]을 동방시조(東邦始祖)님으로 하여 1500여년에 걸쳐 빛나는
조상님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나와 오늘날 동방(東邦)의 대성(大姓)이 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그 지엽(枝葉)이 울창하고 수원(水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장구(長久)한 것은 대자연(大自然)의 원리(原理)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조상의 역사가 뚜렸하고 대대로 기반(基盤)이 확고(確固)한 성씨는
그 자손이 번성(繁盛)하고, 역대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를 주도해 나가고 있음은 지나간
역사가 이미 증명(證明)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강성(姜姓)은 인류창시(人類創始)와 더불어 득성(得姓)한 염제신농(炎帝神農=姜石年)
이래 반 만년(5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씨로서 동방시조 휘 이식장군 이후로
1500여년간을 계승하여 내려와 작간에 명공거경(名公鉅卿)이 무수히 배출되어 자연히
동방의 대성(大姓)으로서 인류사 가장 오래 된 성씨로 단일본 명문거족(單一本 名門巨族)이
되고 있음은 자타(自他)가 공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아! 장하도다.
성인(聖人)의 예법(禮法)을 지은 뜻이 어찌 우연할 것인가!
안으로는 수신과 제가에 힘쓰고 나아가 나라에까지 베풀어 세상에 모범이 되며
인심을 이끌고 종족을 화목케하고 구족(九族)을 친목케함이니
정치하는 데에도 없을 수가 없으리로다.

우리민족은 일찌기 백두산 흑룡강(黑龍江) 일만리 평야 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써 집단(集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대륙의 침략세력(侵略勢力)에 저항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한무제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끌고 나와 침략(侵略)했을 때 희생된 이가 그 얼마 였던지...
강토의 일부일 망정 저들에게 빼았겨 한사군의 설치(設置)를 보았던 것이나
400여년의 끈질긴 저항 끝에 끝내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야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적 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일찍이
공손씨(公孫氏) 혹은 위구(魏寇)와도 싸우면서 장열(壯列)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않이했으며,
마침내 수,당양조(隋,唐兩朝) 五帝 70년 동안 설인귀( 薛仁貴 )700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번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맥(血脈) 속에 전해 내려 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 유역을 무대로 하여 만주와 연해(沿海)의 서쪽으로
요하(遼河)유역까지 강역을 펴갔던 일대강국(一大强國)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가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 세력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域)에 까지
뻗어 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우리 고구려는 민족항쟁(民族抗爭)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문제(隋文帝)가 진(陳)을 병합하고 지나(支那)를
통일한지 17년이라...
수나라가 그간 연곡(年穀)이 자주 풍등(豊登)하고 갑병(甲兵)이 매우 풍족하니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다투자 하여 무망(誣罔)을 극하고 패만(沛慢)이 심한 매우 모욕적인 글을 보내어 왔다.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영양열제가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 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할 때
군신들의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강이식장군이 더는 지켜 볼 수 없어 사자후를 토하시길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게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함이 마땅하다]하시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하시니 열제가 이를 낙종(樂從)하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오만을 발하여 임유관(臨揄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병(穢兵) 일만으로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여 수병을 끌어내시어 걸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로써 수나라와의 기나 긴 전쟁 그 서막이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장군의 이름 석자도 보이질 않이하니 이는 김부식이 수서(隋書)만을
초록(抄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지만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장군을 임유관전쟁(臨關戰爭=서기 598년)의 병마원수라하고
대동운해(大東韻解)에는 강이식장군을 살수전쟁(薩水戰爭=서기612년)의 병마도원수라하였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 그리고 남한보(南漢譜).

백상루ㅡ 살수대첩을 치룬 곳

다음해인 영양열제 9년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23년 백제 성덕왕(聖德王)45년이며
수문제(隋文帝)18년(서기 598년)이다.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급습하여 수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장충(張忠)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하니 이에 자만한 수문제가 30만 대병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뜨게 하니 이는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나 실상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요서로 와서 양량군(陽諒軍)에게
군량(軍糧)을 보급하기 위함임을 눈치채신 강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영격(迎擊)하여
양선을 침몰시키고 군중(軍中)에 명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라하셨다.

그러니 수병은 식량이 없는데다가 수개월이 흐르메 기아와 질역(疾疫)으로 사망이 낭자하여
퇴군하게 되니 강장군이 바로 추격하여 수상(水上)에서 적을 거의 섬멸시키시고
무수한 군자기기(軍資器機)를 가지고 개선하시었다.
이 때에 수군 8~9할이 수장되었고 살아 돌아간 자는 이천 백여명에 불과 하였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를 징벌할 때 병마원수로써 수병을 임유관에서 대파하시고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 살수대첩 때에 병마도원수로써 을지문덕과 같이 수의
113만대군을 섬멸시키셨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선다.

사적이 조선상고사(신채호 저)와 국방정훈지 (이선근박사 저)에 기록 되어 있다.
봉산사(鳳山祠)를 진주(晋州)에 세웠으며 서기 1975년에 국가에서 봉산사를 성역화하여
영원히 추모한다.

강장군의 묘소는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있다.


            
봉산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비문을 전주후인 문학박사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아! 장하시도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英雄)이여!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리웠다 나타 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 30만을 쓸듯이 무찌르고
우리님 개선(凱旋) 하실 제 그 영광이 어떠하던고!
1300여년이 바람같이 지났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 속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의 전통 자손 만대에 이어가리라.
                                 
전주 후인 노산 이은상 찬.




강이식장군 姜以式 將軍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1)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많은 종족이 대립(對立)하였으나,
다 무무미개(貿無未開)한 유목(遊牧)의 만족(蠻族)들이라,
혹 일시(一時) 정치상의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그 붕괴(崩壞)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繼續)할 터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土着)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으로 만나면 서로 충돌이 많았다.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피차(彼此)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시기였다.

상고(上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건국이래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상태에 있어,

열국(列國)이 서로 침벌(侵伐)하므로 다른나라를 침범(외정:外征)할 힘이 없었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漢)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고, 태·차(太·次) 양 대왕때에는 고구려가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 거의 대등(對等)될 세력이 없으므로,

한을 쳐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隷),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가 되었고, 말기에는 왕위쟁탈의 난(亂)이 중첩(重疊)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僚東)으로서 공손도(公孫度)에게 항(降)하여

고구려가 가장 인민(人民)이 많이 모여살고 기름진 토지를 잃어

약국(弱國)이 되었으므로, 그 약국의 지위(地位)를 면(免)하려 하여

조조(曹操) 자손의 위(魏)나 모용씨(募容氏)의 연(燕)

- 곧 지나 북방나라를 향하여 도전(挑戰)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방(南方)에서 궐기(蹶起)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가졌었고,

고국양(古國壤), 소수림(小獸林), 광개삼대왕(廣開三大王)이 일어나 요동을 쳤고,

또 서북(西北)으로 거란(契丹)을 정복(征服)하고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간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인구가 번성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지나와 견줄만 하였다.
그러나 남방서국대(南方四國對)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생겨
후면(後面)의 견제를 받았으므로, 장수왕 이후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방통일에 전력하였다.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업신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
<수(隋)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請)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그 구구(區區)한 반독립이나마 유지해온 것은,

고구려가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참고 저항하였던 점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망하였더라면
백제나 신라가 다수의 군현(君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古史)를 읽을 때에 신라와 백제가 수에 청원(請援)한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역사일 것이다.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후 통계공 후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단기 4339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錫泰 삼가 기록하다.



원수공(元帥公) 강이식(姜以式)장군,
고구려 영양왕때 고구려 구국명장. 

대모달 즉 고구려 최고사령관으로 부장이자 제자인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건무(高建武=영류태제),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梁萬春) 등이 이름을 떨쳤다


서기 597년(영양왕 8년) 수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사신과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국서내용이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는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 있었다.
평원왕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태자인 영양왕이 등극하자마자
중신회의를 열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장군이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함에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있는 만리장성의 입구인 임유관(臨楡關)으로 출전하여
첨예병 1만명으로 요서(遼西)를 공격하여 수군(隋軍)을 유인하며,
거란병 수천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했으며,

이듬해 다시 대병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징벌하고
수나라 요서 총관 장충(張忠)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퇴병(退兵)하자 수문제는 30만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을 나가게 하고
주라후(周羅候)로 하여금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는 척하였으나

강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임을 미리 알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나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군(隋軍)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맺고 상품교역을 재개하였으나,
10수년이 지난 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 (영양왕 23) 고구려를 침공하자,
강장군이 수륙양군병마도원수(水陸兩軍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의 동생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군사만 113만이고 기타 노역병은 그 2배에 이르는 200만으로
총 300만이 넘는 적군이 침범한 것이었다.

300만에 이르는 군사를 데리고 수황제가 직접 침범한 
친정전투에서 첨 맞이하게 된 인물이 바로 
요동성주 겸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이시었다.
강이식장군이 거느린 요동성 군사는 10만이 고작이었다.

300만의 수군은 강이식장군이 지휘하는 요동성을 포위하여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수나라 총사령관 및 무수한 장군들이 강이식장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으며 무수한 사상자만 남기고 
함락 자체를 포기한다.


수황제는 결국 요동성공략 자체를 포기하고
별동대 30만을 뽑아 평양으로 곧장 진격케 하였다.

이에 수양제(隋煬帝)는 평양을 단숨에 공격하기 위하여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강장군은 을지문덕 장군을 시켜 거짓으로 패한 척하게 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시키자,

적은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하다가 고구려군의 총공격에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백여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원수공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전(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 있었는데
모택동 공산주의자들의 문화혁명 때 유실되었다.




一 이전 始祖 元帥公

諱 이식(以式)

고구려 영양왕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대모달(大模達)
봉산사 음3월10일
중국 만주 봉길현(奉吉縣) 원수림(元帥林) 원수역전(元帥驛前)
대모달 즉 고구려 최고사령관으로 부장이자 제자인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건무(高建武=영류태제),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梁萬春) 등이 이름을 떨쳤다
강이식장군 원수림에 남아 있는 고구려석물들..
(국보화가 시급)

諱 강운기(姜雲紀)668(문무왕 8)년

관검교대장군(官檢校大將軍)
*자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안동도호부 도총병 도진무사 (紫靑光祿大夫尙書左僕身+寸 安東都護府都摠兵都鎭撫使)

檢敎大將軍追封 紫靑光祿大夫尙書左僕身+寸 安東都護府都摠兵都鎭撫使唐高宗滅高句麗置安東都護府於平壤時受此嚼.

검교대장군을 지내고 자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안동도호부 도총병 도진무사에 추봉되시었으니
당고종(唐高宗)이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할때 이 작위를 받은것이다.


고구려 귀족(구국명문)으로서 예우를 해준 것  같다.


백제의 유민들과 더불어 고구려 부흥운동 전개


諱 강수손(姜秀孫)
우부위대장군(右副衛大將軍)


754(신라 경덕왕 3년, 발해대흥 18년)
은자광록대부 우부위대장군을 지내셨다.

676년에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에 견디다 못해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니 
어부지리로 신라의 통치력이 평양 이북까지 미치었다. 

백제의 유민들과 더불어 고구려 부흥운동 전개.

諱 강박(姜王+卜)
관정동대장군(官征東大將軍)

정동대장군 요동도호총병 요동병마원수이시다.
754(신라 경덕왕 3년, 발해대흥 18년)

670∼700년 경 요동에서 출생
754년(발해 천통 6)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요동도도호총병(遼東道都護摠兵), 요동병마원수(遼東兵馬元帥)를 역임했다.

정동(征東)이란 말은 동쪽을 정벌하겠다는 뜻이므로 정동대장군이란 당나라의 동진 정책의 일환으로 발해를 염두에 두고 만든 관직인 듯하다.

이때의 발해 영토는 요동을 확보 못한 채 동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우리 강문은 시조님 이후 150여 년간 7∼8대에 걸쳐 무인의 집안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때만 해도 문관보다는 무관이 더 우대받던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강문은 나라의 버팀목이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성품들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 된 것 같다.

735년(발해 인안 2) 2월 당나라는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 남쪽을 공식적으로 신라 영토로 승인하고 이듬해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사를 보내 답례를 했다.


백제의 유민들과 더불어 고구려 부흥운동 전개.

諱 강극용(姜克庸)
요동도백(遼東道伯)

*태사태보정원후 요동도백.
 (太師太保定遠候遼東道伯).

태사태보정원후 요동도백이시다.
835(흥덕왕 10)년

760∼780년 경에 출생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서 발해에서 중신의 자리에 있었다.
이 시기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긴 때인 676년 이후이다.

이때가 이미 시조님으로부터 200여 년 후인 8∼9대가 내려온 시대이다.

835년(발해 함화 6) 정1품 태사(太師), 태보(太保)에 오르고, 정원후(定遠侯)를 제수받고 요동도백(遼東道伯)을 역임했다.

발해의 선왕(818∼830) 재위 기간은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요동지방을 확보하고 있던 시기였다. 

백제의 유민들과 더불어 고구려 부흥운동 전개.



諱 강택인(姜仁)
*은청광록대부 제학부사 보안후.
  (銀靑光錄大夫提學副使晋安侯).

卜業科第二密直敎導提學副使普安侯唐帝遺太監楊誠設科於威鳳樓時得中官亦唐帝결命也.

복업과에 합격하여 제2밀직교도제학부사를 역임하시고 보안후에 봉.

당제가 태감양성(楊誠)을 보내어 위봉루에서 설과(說科)하였을 때에 관직을 하시었으니 당제의 명한 바라 할것이다.
839(신무왕 1)년
위봉(威鳳)이란 말은 그리 흔치 않은 이름인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양리에 604년(백제 무왕 5년) 서암대사가 창건한 절 위봉사(威鳳寺)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참고 삼아 적어 놓는다.

또 복업과(卜業科)는 신라 시대에 시행하던 제도라는 것도 아울러 적는다.

이때까지 융성했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거란의 잦은 침입과 잦은 화산의 피화(백두산 용암)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백제의 유민들과 더불어 고구려 부흥운동 전개.


諱 강진(姜縉)
  정순공(正順公) 진양후(晋陽候)

*숭인전 사운과 장원 태중대부 판내의령 진양후
(崇仁殿四韻科壯元太中大夫判內議令晋陽候).

숭인전 사운과에 장원급제하시어 태중대부 판내의령을 역임하시고 
정순의 시호를 받으시고 진양후에 봉하였다.
당제가 안동지방 준재(俊才)를 발탁하기 위해 설과 하였을때에 관직을 하셨으니 
당제의 명한바라 할것이다.

이때부터 관향을 진주(진양,진산)로 득본(得本)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정통은 경남 진주(晉州)로 이어지게 되었다.

진주는 고구려 후예들이 뿌리내린 영남의 명승지로 후일 명공거경 애국충신열사 및 
독립운동가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진주일대를 포괄하여 경남 부산등지에 가장 많이 살며 
다음 전북,전남에 많이 분포 거주하고 있다.

일부 후예들이 경북지방에 정착하여 문벌을 떨쳤는데 
당당히 영남문과 급제 배출 제1위의 태백오현 도은공,잠은공 형제가문이 그들이다. 
득본조(得本祖).
875(헌강왕1)년

諱 강여청(姜餘淸)
강감찬장군의 5대조로 진주에서 금주 지금의 금천으로 이주하였다
*문하시랑
*금자광록대부 집사성시랑
 (金紫光綠大夫執事省侍郞).

790출생(추정)
진주에서 금천(지금의 봉천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문하시랑을 역임했고, 강감찬(姜邯贊)의 5대조 이시다. 公 이후에 여러 대(代)가 실전되어 고증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으로 벽상공신인 궁진(弓珍)을 1세로 하고 수보했다. 

諱 강사진(姜思進)
문종 평장사(平章事) 충렬왕 찬성사(贊成事)

*신라멸 삼중대광 단성익찬추충보조 정국평정 일등공신 청성군(三重大匡端誠翊贊推忠補조靖國平定 一等功臣菁城君).

삼중대광 단성익찬 추충보조 정국평정 일등공신으로
신라를 멸하여 왕건(王建)의 고려 개국을 도왔다.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高句麗)!

삼중대광 단성익찬 추충보조 정국평정 일등공신으로 신라를 멸하여 왕건(王建)의 고려 개국을 도왔다.

비로소 고구려의 후신인 고려가 비열한 신라를 패망(935년)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루어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다.

880∼890년 경에 출생하여 956년(광종 7)에 별세하였다

고려조에 와서 918(태조 1)년  문과에 급제하시어 판문하평장사와  충렬왕 찬성사(贊成事)를 임하시고


삼중대광 단성익찬 추중보조 정국평정
일등공신(三重大匡端誠翊贊推忠補조靖國平定 一等功臣)이 되셨으며

 청성군(菁城君)에 봉하고 원충(元忠)의 시호를 받다.

상신(相臣)이라 삼공안(三公案)에 실려 있다. 


묘소는 합천, 의령 접경의 미숭산(彌崇山: 美崇山)에 있었으나 워낙 오랜 세월이라 찾을 길 이 없다.
다만 후대 선조님들의 묘소가 미숭산에 여러 곳이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합천, 의령에 후손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配位:신라왕족 월성 석씨(月城昔氏)

청성(菁城)은 지금의 진주 일대이며 정순공 진(縉) 선조님이 처음 진주에 세거한 이래로 그 후대가 얻은 최초의 군호(君號)이다.
  
외세의 힘을 빌린것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룬 나라는 고려가 처음이니 진정한 삼국통일은 고려가 한것이 된다.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이 힘을 합쳐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며 결국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낸것에 반해 신라는 스스로 투항하여 무너졌으니 부흥운동을 벌이지 않은 나라와 여왕이 탄생된 족속은  삼국 중 신라가 유일하다하겠다.

고구려 멸망 후 여자를 왕으로 앉혀놓고 여자처럼 화장을 한 화랑을 내세워 여자밑에서 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벼슬 다툼과 방탕 타락한 문화를 연 비열한 신라범족을 멸망시키기까지 200여년이 소요되었다.

현재 이 나라가 이처럼 타락한건 어떤 더러운 피의 농간인지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많은 신라의 무리들이 살아남기위해서 고려에 투항했는데 고려는 홍익의 이념으로 다 받아주었다.


참으로 아까운 역사의 시간이 신라 범족들로 인해 소요되었으며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영토를 다시금 회복하지 못하였다.     
 고려개국공조(高麗開國功祖)918(태조 1)년
             

고려 후삼국통일의 주역 금주의 호족
강여청의 고손(高孫) 궁진(弓珍)이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 국과 전국을 평정한 공이 있어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하여 지고 금천(衿川)을 관향으로 하사받아 
명법에 따라 고조인 여청(餘淸)을 시조로 받들었으니 그가 강감찬장군의 5대조이다.
강감찬장군은 고구려 강이식장군의 12세손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삼한벽상공신 강궁진(姜弓珍)장군의 배위는 
김해군부인 허씨 (許氏)로 경민(敬敏)의 따님이다.
장군의 아들이 바로 문곡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강감찬장군이시니...

한국 민족의 역사상 구국안민의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분은 
바로 강감찬 장군임은 역사가 입증한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년간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강이식장군과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4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공의 부인은 함양군대부인 오씨(吳氏)이며 문정공 숙(淑)의 따님이다. 아들은 사재경 행경(行經)이고 손자는 추밀원사 역임하고 태자태 사에 증직된 원광(元廣)이다.

諱 강기장(姜起章)
판문하동평장사(判門下同平章事)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성현시장원 벽상삼한 삼중대광 병마도원수
(省見試壯元壁上三韓三重大匡兵馬都元帥).

성현시에 장원하시어 판문하동평장사를 거쳐 병마도원수가 되시다.

934(태조 17)년

諱 강구만(姜九萬)
정절공(正節公)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
*문과장원 중대광 영상서 태사중서령 양천부원군
(文科壯元 重大匡領尙書太師中書令陽川府院君).

호ㅡ 남암수(南巖수)

문과에 장원하시어 태사중서령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중대광영상서문하도성사와 판이부병부사 겸 서경유수를 지내시었다.
양천부원군에 봉하고 정절의 시호를 받으셨다.

호는 남암수(南巖수)이시고 진주 대봉산에 살으시었는데 집위에 대암(大巖)이 있고 그 바위 위에 소암(小巖)이 있어 강남도사(江南道士)가 지나가다가
강씨(姜氏)가 번성하는 것은 이 바위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영상서(領尙書)라 삼공안에 실려있다.


諱 강사미(姜士美)
원정공(元貞公) 판례부사(判禮部事)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겸 판예부사.
 (金紫光錄大夫樞密院事兼判禮部事).

문과에 급제하시어 비서감추밀원사(秘書監樞密院事)와 동지양현전직학사(同知養賢殿直學士)와 국자제주판예부사(國子祭酒判禮部事)를 지내셨다.
시호는 원정(元貞)이다.

1035년

諱 강홍(姜洪)
고려 현종(顯宗) 상서(尙書) 파고부원군(坡高府院君)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중서문하시중 파평부원군
(金紫光錄大夫重書門下侍中坡平府院君).

자정전 명경과(資政殿明經科)에 급제하시어 상서좌복야 (尙書左僕身+寸)중서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시고 자금어대를 하사 받으셨으며 파평부원군에 봉하였다.

현종 때에 상신을 지냈다

경의 형제 11인이 다 경상(卿相)의 높은 벼슬에 계셨으니 
합문지후 이지원(李之元)이 그 세력의 융성함을 시기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봉바위를 격파하니
그 속에 포주막만한 백색의 돌 4개가 있으므로 다시 철퇴로 부수니 
돌속이 붉은 혈(血)로 가득차 버렸다.

그 후 몇 해 안가서 적신(賊臣) 척준경(拓俊京)의 모함으로 공의 형제들이 모두 적지(謫地)에서 돌아가시고 화(禍)를 입으신 가족들이 20여인이나 되었으며 이로부터 강씨가 한때 주춤하였다.

인과응보련가! 결국 이지원이 난을 지어 이지원은 죽고 척씨는 씨가 말랐다.
1110(예종 5)년



諱 강호덕(姜好德)
문종(文宗) 상서(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봉상대부 부령한림학사.관불사(冠不仕)
 (奉常大夫副令翰林學士).



1115(예종 10)년 양현전 교정과에 급제하시어 부령한림학사를 지내셨으며 상서공꼐서 피화에 진도로 유배되시니 울분을 머금고 41세에 돌아가시었다.1115(예종 10)년

諱 강진보(姜晋寶)
상서(尙書)
*13세 집현전 보직,18세 한림원 시강문학
 관불사(翰林院爲侍講文學冠不仕).

호(號)ㅡ임천조수(臨川釣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잘 하셔서 13세에 집현전에 보직되시니 당시의 선비들이 공을 따를자가 없었으며 18세에 송산관시(松山觀試)에 참시하여
한림원 시강문학에 선발되시었다.

갑자기 척준경의 화를 당하여 상서공과 부령공께서
유배지에서 돌아가시니 분통하여 벼슬을 버리시고
금계조청(지금의 진양군 금산면 금호동)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1174(선종 12)년

諱 강홍명(姜鴻冥)
고종(高宗) 상서사(尙書事)
*중대광 광록대부 동평의사 상서사.
 (重大匡光錄大夫同評議使尙書事).
다시금 봉황(鳳凰)이 날개짓을 하다


자ㅡ자거(子擧) 호ㅡ학주(鶴洲).

1212(강종 1)년 문과에 급제하시어 판자정전참리사현윤위(判資政殿參理使顯尹尉)와 동평의사상서사를 역임하시었다.
 1212(강종 1)년

諱 강철영(姜哲永)
18세 무과장원 공민왕(恭愍王) 수군삼도도통사
(水軍三道都統使)
*18세 무과장원 20세 은청광록대부 수군삼도도통사
(武科壯元 銀靑光錄大夫水軍三道都統使)


18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시어 20세에 수군삼도도통사가 되시었다.
공민왕(恭愍王)
1234(고종 21)년

諱 강도(姜度)
고종(高宗) 보문각 교감판내사(校勘判內事) 원수공(元帥公)
23세손(二十三世孫)

*금자광록대부 상주국 부마교위
  (金紫光祿大夫上柱國駙馬校尉)
원수공(元帥公) 23세손(二十三世孫)



 문과에 급제하시어 보문각교감 판내사령(寶文閣校勘判內事令) 을 지내시고 금자광록대부 상주국 부마교위 검교좌우복야문하사(金紫光祿大夫上柱國駙馬校尉劍校左右僕야門下事)에 추봉되시었다.


묘소는 진주대곡이라하나 실전되어 통탄스럽다.
1259(고종46)년.

고구려 원수공 23세까지(빠지신 분들이 많음).

諱 강원용(姜遠庸)
문하시중(門下侍中) 
삼대손(三代孫)강계용(姜啓庸)

*삼중대광 판문하시중
 (三重大匡判門下侍中)



판문하시중 벼슬을 역임했으며 관서공파 1세조인 원로(元老)의 조부(祖父)이시다. 

諱 강기문(姜起文)
보각직제학(寶閣直提學)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관서공파(關西公派) 1세인 원로(元老)의 부(父)이시다.

諱 강보능(姜甫能)
*원윤(元尹)



은열공파 강민첨장군의 친부(親父)이시다.
이하 3분은 정보요약...



시 대
성     명
내             용
비    고
고려(高麗)

문성공(文成公)

 諱 희경(希經)

  *종1품(從1品)*

 *중대광 문하시중 동지밀직제학 문성공.(重大匡門下侍中 同知密直提學文成公).

문과에 급제하시어 문하시중 동지밀제학 평의사내사령을 역임하시고 문성의 시호를 받으셨다.

일설에 이르기를 공의 아우 3인이 있어
희륜(希倫)은 태자첨사(太子詹事)이며,
희준(希準)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요,
희충(希忠)은 보승장군(保勝將軍)이라 한다.


1084(선종 1)년 문과 급제,


고려(高麗)
금천공(錦川公) 諱 복민(福民)

*정2품(正2品)*
 *금천군사 동정결추위.
(判錦川郡事同正潔樞尉).

금천군사를 지내셨으며 동정결추위이시다.

1144(인종 22)년
한림공(翰林公)  
諱 창서(瑞) 


*정4품(正4品)*
 *문과장원 봉상대부 한림학사.
(文科試壯元奉常大夫翰林學士).

강남학자로서 작문짓는데는 그 위에 올라 설 선비가 없을정도로 출중하셨으며 문과에 장원급제하시어 한림학사가 되시다.

1211(희종 7)년

*고구려 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위대한 역사적 공훈(功勳)*

 1) 강이식 장군은 그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였던
수(隨)제국의 침략야욕과 도전 앞에 우뚝 맞서서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우리 겨레의 저항정신(抵抗精神)과

애국심(愛國心)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를 극복하고
능히 호국안민(護國安民)하는 우리 민족불멸(民族不滅)의
군인정신(軍人精神)을 자신의 행동으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굳건히 정립(定立)해 놓으셨음.

2) 수문제(隨文帝)의 대군을 보기 좋게 격파한
강이식 장군의 과감하고도 슬기로운 전략(戰略) 전술(戰術)은
동양의 전통 군사학(軍事學)에 견주어볼 때 우선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3대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가 용병작전(用兵作戰)에 이를 활용하는데
신축자재(伸縮自在)한 여유를 간직하고
진퇴(進退)와 완급(緩急)에 차질이 없게 함으로서
언제나 최후의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음.



3) 서북대륙의 강대한 침략세력에 대한 고구려의 능동적인
전략전술(戰略戰術)은 임유관(臨 關) 전투에 승리한
강이식 장군에서 비롯되어 수양제(隨煬帝)의 백만 대군을 격퇴한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을지문덕 장군에게로 계승되고

수제국(隨帝國)의 패망을 초래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원천하(中原天下)를 차지한 당제국(唐帝國)의 엄청난 침략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서 안시성(安市城)까지

대동강(大洞江) 유역에서 요하(遼河)의서안(西岸)에 이르는
광활한 무대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게 전개되었던 연개소문,
양만춘같은 명장(名將)들의 혈맥(血脈)으로
전승(傳承)되어 결코 끊이지 않았음.

4) 강이식 장군께서 선양(宣揚)한 백전불패(百戰不敗),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군인정신과 국가안보를 위한 유형 무형의
여러 가지 위대한 업적은 
거란족을 상대로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龜州大捷),

몽고침략에 40년의 항전(抗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등으로 이어져 

조국의 강토와 주권을
보전하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어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불멸(永遠不滅)의 향기를 우리의 가슴에 안겨 주고 있음

<참조 : 진주강씨 관서공파 족보서문 1982년 7월 23일 전문교부장관,

문학박사 全州后人 李瑄根> 


 살수대첩을 치룬 곳...백상루..

 *대모달 강이식장군 약력*

대고구려제국[大高句麗帝國] 동명대회[東明大會]장원[壯元]
부친 요동성주[遙東城主] 강철상[姜哲尙]公에게 무예와 학문을 직접 전수받으심
부친에 이어 요동성주가 되신 후 중원통일 수나라의 전쟁기미를 읽으시고
말갈 1만명을 거느리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하여 사지로 끌어들임.

대모달[大模達]로 승진

동명대회에 장원한 기재 을지문덕을 휘하로 두어 서부총관의 벼슬을 맡기고
고구려 원수(元帥=대모달 =병마도원수)의 직책으로 수나라와 본격적인 천하패권의 전쟁을 시작하심

중원 백성들의 원성에도 수황제는 전쟁을 감행 30만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옴
임유관에서 전멸시키심 

이후 군사 130만 기타 노역병[신라 쌀배달꾼 포함] 200만 총 330만을 이끌고 수문제의 침략 시작
임유관 및 살수등지에서 8~9할을 몰살시키심.

침략군 300만 중 중원으로 살아돌아간 자는 겨우 2000명 남짓에 불과하여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힘
이로써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섬.
이후 직계수자인 을지문덕,연개소문,건무,양만춘등에게 나라의 국운을 맡기시고 수를 다하심
아들은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큼!

당군 왕세적 및 호걸들이 당나라의 고구려침략을 반대하고 산적이 되어 유명한 시를 남겼으나
당제에 의해 모두 제거됨.

이후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기 위해 고구려 호족들을 대거 몰살하여 고구려의 전력이 분열됨
고구려 백성들의 동요를 차단키 위해 당나라로 처들어가 당제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나 오래 못감. 

이 시기는 고구려말기로 강장군의 후손들이 연개소문일당에 의해 피해를 입으셔서 신라로 내려와 연합했을 가능성이 큼.
연개소문의 아들들과 핵심 고구려세력들이 이 시기 이주한 강족을 따라 신라로 대거 이주함
고구려 원수(元帥)급 인물들의 신라이주로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갑자기 강해지고
가장 강했던 고구려의 힘이 일시에 약소해짐
이 세력들이 한반도 삼국 중 신라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데 지대한 힘이 되었으나 고구려의 역사를 온전히 지켜내지는 못했음.

이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성문을 열어 준 후 고구려의 막은 내려지고 고구려 유민들은 뿔뿔히 흩어짐.
당과 신라의 고구려 역사 왜곡 시작
고구려 수 많은 명장들과 조의선인들의 이름 및 역사를 불사르고 역사에서 지워버림..
고구려 이전의 역사(단군조선,환웅,환인)를 신화로 변조하고
웅족 단군을 곰이 낳은 자식으로 왜곡해버림.

신라는 당의 연호를 따르고 당나라식으로 의복을 입고 당나라식 창씨개명 시작!
고구려의 개국 연대를 서기 전에서 서기 후로 역사 변조
고구려의 조상인 염제신농과 치우천황을 비롯한 단제를 신화로 왜곡 오도하고 단제(檀帝)를 단군(檀君)으로 왜곡시켜 중국 한족보다 한 수 아래의 민족으로 격하시킴!
이하 차마 열거할 수 없음..

이 후 고구려의 후신국인 발해와 고려가 세워져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나 오래 못감. 
이성계 및 고려배반 세력으로 인해 중국사대 조선이 들어섬..
이후 한민족은 타 민족 눈치나 보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음.  

 by unprecedentedness 破天荒 姜錫泰
고구려 역대 聖帝


동명성제
(東明聖帝
BC58년
~BC19SUS)

고주몽의 선조는 단제의 일파인 해모수(解慕漱)로
단제조선(檀帝朝鮮 -君이 아닌 帝이다.)의 뒤를 이어
오가를 통합하고 삼사(三師)의 추대로 단제가 된 성군(聖君)이다.

후 나라를 안정시킴에 있어 단제조선을 부여라 명칭하고
이로써 부여국의 단제가 되었다.
동명은 해모수의 후손으로 성은 高-(本姓은 ?), 휘는 주몽. 동부여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주 - 단군은 치우천황을 이은 나라고 해모수 및 고주몽은 단군을 이었음으로
해모수나 고주몽의 해나 고는 성이 아닌 호로 봄이 합당하다.
고구려인들은 높다 크다의 의미인 고(高)를 호로 많이 삼았을 뿐
원성(姓)과 명(名)은 가려져 있는 것이다.
현재의 무가치한 사학자들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원성명보다 호를 많이 사용하였음으로
응당 고구려의 얼이 남아있다 할 것이다.

중국도 고구려식 자(字)호(號)법을 배워갔을 뿐임을...
호와 자를 왜 썼어야했는지조차 모르는 망자들에게
역사는 그저 무의미한 껍질에 불과할 뿐이다.
2대

유리명(열)제(榴璃明帝)
(BC19년~18년)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제 아들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제위 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제위 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3대


대무신제(大武神帝 4년~44년)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4대


민중원제(閔中元帝44년~48년)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제의 동생. 대무신제가 죽은 후
태자의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5대



모본제(慕本帝48년~53년)





대무신왕의 아들. 이름은 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민중원제의 형.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杜魯)에게 피살됨

破天荒 주 - 고구려인들의 성품이 고스란히 묻어난 듯 하다.
자격없는 자가 정권을 잡으면 목숨을 걸고라도 친다.
고귀한 희생정신의 결과로 후일 엄청난 철인들이
고구려열제의 자리에 앉아 천하대제국을 일군 밑바탕이 된 건 아닌지...

6대


태조(太祖,國祖열제國祖烈帝)
(47년~165년)









유리왕의 손자로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열제(烈帝)가 됨
고구려백성들로부터 태조(太祖)라 칭해짐 

7대


차대왕
(71년~165년)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8대


신대왕
(165~179)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9대


고국천
(179~197)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10대


산상왕
(197∼227)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11대


동천왕
(227∼248)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12대


중천왕
(248∼270)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13대


서천왕
(270∼292)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14대


봉상왕
(292∼300)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15대



미천왕
(300∼331)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16대

고국원제(故國原帝, 331~371)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이 때부터 고구려인들의 신라와 더불어 백제와의 적개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고구려인들의 전력이
한반도로 분산되어 한민족 힘의 약화를 불러왔다.
17대
소수림제(小獸林帝371~384)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제 아들.
제위 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이 때부터 한민족 고유의 신선(神仙)사상과 불교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과도기를 이룸
18대

고국양제(故國壤, 384~391)

휘는 이련(伊連). 고구려 선조들의 얼을 이어받아 북방 세력들을 몰아내어 요동을 정벌하였으며 아울러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19대

광개토대제(廣開土大帝,375~413)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

고국양제의 장남. 휘는 담덕(談德). 천손족(天孫族) 고유의 
신선도(神仙道)와 융합된 고구려식불교를 신봉하였고,

조상 치우천황 때의 영토를 회복하려 19세의 나이로
전쟁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섬,
이후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북으로는 만주와 거란 및 연나라를 정복하고
남으로는 신라,가야 ,백제의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신하로 삼고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백제와 신라의 왕권은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어
고구려 천손과의 혈맥이 썩이는 것을 원치않았으며
왜(倭)를 견재하는 상책을 택함

호태왕(好太), 영락대왕(永樂).
열제(烈帝)라는 칭호를 얻었음.
연호 영락(永樂)


20대


장수대제(長壽大帝, 394~490)
-장수홍제호태열제-
(長壽弘濟好太烈帝)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제 맏아들.
북방정책을 감행하여 치우천황 때의 영토의 2/3를 확보한
광개토대왕의 얼을 이어받아 대륙확장에 힘을 쏟았으며,
배은망덕한 남쪽의 신라와 백제 정벌을 감행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帝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고. 제위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이후 일본과 거란 동부여 대륙을 잇는
중심국가로의 네트워크를 확립함


21대
문자명제(文咨明帝, ?~519)
-문자호태열제-
(文咨好太烈帝)






휘는 나운(羅雲),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제위 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초강대국으로 발전함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연호 명치(明治)

22대



안장제(安藏帝)(519~531)






 휘는 흥안(興安) 문자명제의 맏아들.
치세 12년간 백제와 두차례 싸울 뿐 전쟁을 극히 회피하고
고구려 문화발전에만 전력함
겸손의 극치를 이룸 




23대



안원제(安原帝)
(531~545)



휘는 보연(寶延). 안장제의 아우.
치세는 14년간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는 등
고구려의 안정에 힘씀. 


24대



양원제(陽原帝)(545∼559)





휘는 평성(平成).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고구려를 침략하는 돌궐의 침입을 많이 격퇴 하였으나
이로인해 고구려의 전력을 북방으로 쏟아
남방한계선을 허술하게 대처해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제(平原帝, 559~590)
-평강상호태열제
(平岡上好太烈帝)




휘는 양성(陽城).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자신의 딸인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장군의 오작교사랑등
민간에 전파된 고구려인식 사랑등장
온달장군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함
26대



영양제(瓔陽帝, 590~618)
-영양무원호태열제(瓔陽武元好太烈帝)






휘는 원(元). 평원왕의 태자.
帝 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신라의 꽴에 넘어간
수황제가 고구려에 조공하라는 거만한 서찰을 보내옴
598년 분노한 강이식장군을 보내니 강장군은
고구려 정예가 아닌
단지 말갈 군사 1만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니 기다리기라도 한듯
강이식장군이 고구려 철갑기병 5만을 대동하고 격퇴
전멸시켜버림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강이식장군과 부장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다시
적을 섬멸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높힘 

이후 중국은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섬
27대


영류제(榮留帝,618~641)
-고성제(高成帝)




휘는 건무(建武). 영양왕의 이복동생.
외교수안을 발휘하여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고구려백성들을 되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천리장성 축조는 고구려 때부터였음. 
중국식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여 고구려에 전파함.
연나라 후손인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역시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제(寶藏帝)
(642∼668)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전쟁에 지친 고구려인들이
성문을 열어주어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제는 당나라로 압송됨
수나라 당나라를 거친 72년간의 기나긴 전쟁의 여파로
동이족 치우천황 때의 역사사서 및 활약한 장군들의 함자들이
당고종을 위시한 이세적(李世勣) 및 신라범족들의
역사말살정책으로 모조리 불태워지고 왜곡됨

후일 고구려의 뒤를 이어 해동성국 발해와 고려로 이어져
고구려를 위협하던 거란을 고구려의 직손들인
고려의 강감찬 강민첨장군이 기어이 소멸시켜 버림
지금 남아있는 건 모조리 당과 신라로 인해 자행된
사대주의적 왜곡된 역사서들임
고구려의 광대한 기상과 역사가 한반도내로 전락하여
현재의 약소민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고구려 관위(官位)

  
시대
     품계(品階)                관명(官名)
내용
高句麗
비정1품(比正1品).
 대대로(大對盧),

-
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의 관등.

귀족회의에서 선출되며 왕은 대대로의 선임에 개입하지 못했다.

임기는 3년이나 현명한 인물, 혹은 독재자인 경우에는 얼마든지 그 임기를 연장할 수 있었다.


비종1품(比從1品).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리지(文官:莫離支),
대모달(武官:大模達=대당주(大幢主))ㅡ강이식(姜以式)

고구려 최고의 무관 관직

수도의 방위와 고구려지휘부
중앙군을 지휘통솔감독 


비정2품(比正2品).
 태대형(太大兄)
-족장(族長)들의 수장

구정관장자로 유력귀족가문의 대표가 차지하였으며, 특히 군사권을 쥐고있던 관직


高句麗

비정3품(比正3品).

대부사자(大夫使者),
태대사자(太大使者)


비종3품(比從3品).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행정권, 인사권, 군사권의 행사를 독점

국가 기밀,개법(改法),징발(徵發),관작(官爵)수여등을 맡음

高句麗
비정4품(比正41品).
 대사자(大使者),태사자(太使者)
-국왕 직속의 것과 귀족인 제가(諸加


비정5품(比正5品).

대형가(大兄加=대형),힐지(纈支),
의후자(意侯者) 


비종5품(比從5品).

발위사자(拔位使者) 
-수취나 교역을 담당


高句麗

비정6품(比正6品).

상위사자(上位使者),결건사(決達奢) -
조부(租賦)를 총괄하는 관리 

비종6품(比從6品).

 사자(使者),을시(乙蓍)
-대가의 밑에서 재물의 출납을 관리하는 관직


高句麗

비정7품(比正7品).

  
소형(小兄),소사자(小使者) 
-현장 감독관으로 실무에서 직접뛰는 직위로 지방의 조세나 공물을 거두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비종7품(比從7品).
  
제형(諸兄),이소(伊紹) 

비정8품(比正81品).
  
화절(禍節),선무(先无) 

高句麗
비종8품(比從8品).
  
부절(不節),서인(庶人) 


비정9품(比正9品).

 욕사(褥奢)
 .

高句麗

비종9품(比從91品).

  
 예욕(翳욕)


  
조의선인(早衣仙人)
=백의선인(帛衣仙人)
=비의선인(卑< SPAN>人)
< SPAN> 
-고구려의 모든 인물들이 거쳐야하는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수련을 하는 선인(仙人)들.

이 수행단계를 거쳐야만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고구려 조의선인(早依仙人), 오상지도(五相之道:  忠 孝 信 勇 仁)를 신라가 모방하여 화랑(花郞)이 만들어짐. 


■ 우리 고대사의 10대 수난사

제1차ㅡ 고구려 동천왕 18년 위나라 장군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격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제2차 ㅡ백제 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에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진됨



제3차 ㅡ고구려 보장왕 27년 당의 장군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 함.(이 때 고구려 선가(仙家)의 사서들을 모조리 불태우는데 수개월이나 걸렸다함

)

제4차 ㅡ신라 경순왕 원년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 책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 당할 때 방화 소각 됨.


제5차ㅡ 고려 인종 4년 금나라에 서표(상국으로)로 바친 후 주체서적은 철수해 감.

제6차 ㅡ고려 고종 20년 몽고난으로 홀필렬에 의해 소각됨.


           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짐.



제7차ㅡ 조선 태종 11년 5부학당을 송제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교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제8차ㅡ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제9차ㅡ 병자호란 때 아까운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림.



제10차 ㅡ일본강점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이젠  이상 소각될것도 소각할것도 없다..젠장..... 

일제의 철저한 민족사 뿌리 말살 .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발악하였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 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하였다.



1. 조선사편수회



조선총독부는 6년간 전국을 압수,수색하여 무려 51종 20여만 권의 역사서를 소각,

폐기하고 일부는 그들의 황실 도서관으로 빼돌렸다.

이리하여 당시까지도 상당량 남아있던 고유사서들은 모두 사라지고

황국 식민사관이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2. 남겨진 역사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치밀한 우리의 역사 개조작업을 한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여기에 들어간 재정이 100만원 이상이었다.

당시 돈으로 쌀 한 가마니가 10원 미만이었는데,

그 책을 쓰는데 쌀 10만 가마 이상을 썼다는 것이다.



이 책 출간에 참여한 대표적 한국인이 이마니시류의 제자,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이병도였다.



3. 조선사 』 35권 (made in Japan)



일제는 조선사를 왜곡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 대표적인 문헌이 바로 불교사서인 『삼국유사 』와 유교사서인



『삼국사기 』였다.



그런데 그 마저도 일본의 어용사학자 '이마니시류'에 의해 김부식의

『삼국사 』는 『삼국사기 』로 제목이 바뀌고 『삼국유사 』

「고조선 」조의 환국(桓國)의 국(國)을 인(因)으로 변조하여

우리역사의 원뿌리인 환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3 ·5대 총독이었던 '사이또 마사오'가 조선사람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시달한 교육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케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청년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역사적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져 외래 종교와 외래 사상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그 때 일본문화, 일본의 우수한 사상을 접하게 하여 ....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들 수 있는 요결인 것이다.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후 통계공 후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대대로 전한 옛터에 사당을 처음 세운것은 선조3년(서기1570년)이요,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이 무너졌던 계사년(서기1593년)에 불타버렸다가 백여년 후
순종 4년(서기 1724년)에 중건했으나 순조때에 또 불타버리고 뒤에 다시 개축재건(改築재建)을 거듭한 나머지 이 같이 장엄한 새집을 이루어 놓았다.

세기하면...
소 재 지 : 진주시 상봉동 972-2


. 봉산사鳳山祠 연혁(沿革)
-서기 950년대인 고려 광종때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구전됨
-1570년(선조3) 봉곡촌에 사당 건립

-1593년(선조26)6월 임진란으로 소실
-1714(숙종42)대봉산 밑에 사당 중건

-1802년(순조2) 화재로 소실
-1911년 선대 어른들이 합심하여 봉란대 동북쪽 봉서동에 대지를 마련하고 다시 사당을 중건하였으나 왜정치하에서 철폐됨

-1920년 일제하에 국유지가 된 것을 종중에서 매입 1921년(신유)사당 건립
-1940년(경진) 토지 수용령에 의거 철거된 것을 후손들이 봉지옆 예전 봉암이 있던 자리 위쪽에 대지 200여평을 마련 이전함.

-1974년 12월 중순 일본거주 계중(桂重) 현종이 시조사를 참배하고, 사당이 협소하고 노후된 것을 보고 재건키로 결심 일본에 건너가 일본 일가들과 재건 협의, 한화 3억5천만원으로 사우 재건하기로 결정

1976년 5월 29일 기공식 거행(대지 4957평 건물 : 본전 82평, 박물관 68평, 외삼문 18평, 대삼물 15평, 화장실 10평, 구사당 8평, 전체 190평)

1978년 7월 25일 봉산사 재건 추진위원회 진주강씨 중앙종친회 사단법인 강이식 장군 숭모회 공동 명의로 문화공보부를 통해 정부에 기증함(공정 76.1% 진척 소요금액 437,550,000원)


-1983년 12월 20일 봉산사 준공식 및 시조님 영정봉안식 거행

강장군으로부터 1400여년간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었으니 각파 역대를 통하여 문무장상(文武將相)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므로 여기에 세운 봉산사는 다만 강씨일문(姜氏一門)의 영광(榮光)이 아니요, 민족 전체의 자랑이라!

우리 모두 민족의 영웅 앞에 참배하고 장군의 의기(義氣)와 전통(傳統)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임유관 전쟁 후 1379년 되는 단기 4310년 서기 1977년 3월 1일 후학 문학박사 노상 이은상 짓고
영가(永嘉) 김충현 쓰고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姜錫泰 삼가 기록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인들과 고구려 문화





고구려인의 상무정신만이 한민족을 다시금 구하리..
 강이식장군 역사공원 조성...

고구려 조의선인의 개물교화(開物敎化)와 철인(哲人)

                                                    聯!!!

難得來此歡迎之至 苦肉之罪 淨土復歸  字無知己天孤只一人絶筆

어렵게 이 곳까지 온 것을 환영하노라.육신의 죄로 정토에 복귀하도다.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천하에 외로웠던 한 사람이 남기노라.

眞風流士 熊眞子 昊聖 破天荒 姜錫泰 筆!

개물교화(開物敎化)와 철인(哲人)-고구려 조의선인의 가르침
명철(明哲)한 사람!
즉 철인이 항상 마음을 비워 고요한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개율이다.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작금애 그 원 의미를 제대로 깨우친 인간은 지구상 5손가락에도 못미치는 수이다.
이는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도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철인은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며 태평하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때문에 철인은 뭇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안 되는 일이 없고
풀리지 않는 메듭이 없어서 항상 만사형통한다.

군대를 동원하는 근본이유는 타국이 침략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형벌을 주는 것은 죄를 없애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허(虛)를 자극하면 정(情)이 생기고 정을 자극하면 지혜가 가득해지고
지혜가 가득차면 덕이 융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비워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고여한 가운데 모든 것을 헤아리고,
지혜를 구사하여 온갖 일을 이치대로 처리하고,
덕으로 사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곧 신시(神市)의 개물교화이다.
하늘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法을 세우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식을 닦고 수련을 쌓아
교화(敎化)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을 이룬 이가 바로 철인(哲人)이다.,


 고구려 원수공 52세 후 박사공 27세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姜錫泰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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