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시민의 심법은 어디있나?
자유민족의 근간인 근본 뿌리
호주제부활
군가산점부활
여성가족부폐지
이 3가지는 진정한 자유민주시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기초과제이다.
고구려 강이식 대모달(병마도원수) 고,수전쟁
高句麗 姜以式 大模達(兵馬都元帥) 高,隋戰爭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선조들께서 쌓으신 어진 덕과 빛나는
공적[功積]의 결과임을 아무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멀리 고구려[高句麗] 시대 구국공신이신 병마도원수공 휘
이식장군[以式將軍]을 동방시조(東邦始祖)님으로 하여 1500여년에 걸쳐 빛나는
조상님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나와 오늘날 동방(東邦)의 대성(大姓)이 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그 지엽(枝葉)이 울창하고 수원(水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장구(長久)한 것은 대자연(大自然)의 원리(原理)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조상의 역사가 뚜렸하고 대대로 기반(基盤)이 확고(確固)한 성씨는
그 자손이 번성(繁盛)하고, 역대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를 주도해 나가고 있음은 지나간
역사가 이미 증명(證明)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강성(姜姓)은 인류창시(人類創始)와 더불어 득성(得姓)한 염제신농(炎帝神農=姜石年)
이래 반 만년(5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씨로서 동방시조 휘 이식장군 이후로
1500여년간을 계승하여 내려와 작간에 명공거경(名公鉅卿)이 무수히 배출되어 자연히
동방의 대성(大姓)으로서 인류사 가장 오래 된 성씨로 단일본 명문거족(單一本 名門巨族)이
되고 있음은 자타(自他)가 공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아! 장하도다.
성인(聖人)의 예법(禮法)을 지은 뜻이 어찌 우연할 것인가!
안으로는 수신과 제가에 힘쓰고 나아가 나라에까지 베풀어 세상에 모범이 되며
인심을 이끌고 종족을 화목케하고 구족(九族)을 친목케함이니
정치하는 데에도 없을 수가 없으리로다.
우리민족은 일찌기 백두산 흑룡강(黑龍江) 일만리 평야 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써 집단(集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대륙의 침략세력(侵略勢力)에 저항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한무제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끌고 나와 침략(侵略)했을 때 희생된 이가 그 얼마 였던지...
강토의 일부일 망정 저들에게 빼았겨 한사군의 설치(設置)를 보았던 것이나
400여년의 끈질긴 저항 끝에 끝내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야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적 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일찍이
공손씨(公孫氏) 혹은 위구(魏寇)와도 싸우면서 장열(壯列)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않이했으며,
마침내 수,당양조(隋,唐兩朝) 五帝 70년 동안 설인귀( 薛仁貴 )700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번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맥(血脈) 속에 전해 내려 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 유역을 무대로 하여 만주와 연해(沿海)의 서쪽으로
요하(遼河)유역까지 강역을 펴갔던 일대강국(一大强國)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가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 세력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域)에 까지
뻗어 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우리 고구려는 민족항쟁(民族抗爭)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문제(隋文帝)가 진(陳)을 병합하고 지나(支那)를
통일한지 17년이라...
수나라가 그간 연곡(年穀)이 자주 풍등(豊登)하고 갑병(甲兵)이 매우 풍족하니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다투자 하여 무망(誣罔)을 극하고 패만(沛慢)이 심한 매우 모욕적인 글을 보내어 왔다.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군신들의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강이식장군이 더는 지켜 볼 수 없어 사자후를 토하시길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게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함이 마땅하다]하시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하시니 열제가 이를 낙종(樂從)하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오만을 발하여 임유관(臨揄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병(穢兵) 일만으로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여 수병을 끌어내시어 걸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로써 수나라와의 기나 긴 전쟁 그 서막이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장군의 이름 석자도 보이질 않이하니 이는 김부식이 수서(隋書)만을
초록(抄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지만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장군을 임유관전쟁(臨渝關戰爭=서기 598년)의 병마원수라하고
대동운해(大東韻解)에는 강이식장군을 살수전쟁(薩水戰爭=서기612년)의 병마도원수라하였다.
백상루ㅡ 살수대첩을 치룬 곳
다음해인 영양열제 9년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23년 백제 성덕왕(聖德王)45년이며
수문제(隋文帝)18년(서기 598년)이다.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급습하여 수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장충(張忠)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하니 이에 자만한 수문제가 30만 대병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뜨게 하니 이는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나 실상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요서로 와서 양량군(陽諒軍)에게
군량(軍糧)을 보급하기 위함임을 눈치채신 강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영격(迎擊)하여
양선을 침몰시키고 군중(軍中)에 명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라하셨다.
그러니 수병은 식량이 없는데다가 수개월이 흐르메 기아와 질역(疾疫)으로 사망이 낭자하여
퇴군하게 되니 강장군이 바로 추격하여 수상(水上)에서 적을 거의 섬멸시키시고
무수한 군자기기(軍資器機)를 가지고 개선하시었다.
이 때에 수군 8~9할이 수장되었고 살아 돌아간 자는 이천 백여명에 불과 하였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를 징벌할 때 병마원수로써 수병을 임유관에서 대파하시고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 살수대첩 때에 병마도원수로써 을지문덕과 같이 수의
113만대군을 섬멸시키셨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선다.
사적이 조선상고사(신채호 저)와 국방정훈지 (이선근박사 저)에 기록 되어 있다.
봉산사(鳳山祠)를 진주(晋州)에 세웠으며 서기 1975년에 국가에서 봉산사를 성역화하여
영원히 추모한다.
강장군의 묘소는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있다.
봉산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비문을 전주후인 문학박사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아! 장하시도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英雄)이여!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리웠다 나타 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 30만을 쓸듯이 무찌르고
우리님 개선(凱旋) 하실 제 그 영광이 어떠하던고!
1300여년이 바람같이 지났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 속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의 전통 자손 만대에 이어가리라.
전주 후인 노산 이은상 찬.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업신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
<수(隋)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請)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그 구구(區區)한 반독립이나마 유지해온 것은,
고구려가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참고 저항하였던 점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망하였더라면
백제나 신라가 다수의 군현(君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古史)를 읽을 때에 신라와 백제가 수에 청원(請援)한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역사일 것이다.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후 통계공 후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단기 4339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錫泰 삼가 기록하다.
|
시 대
|
성 명
|
내 용
|
비 고
|
고려(高麗)
|
문성공(文成公)
諱 희경(希經)
*종1품(從1品)*
|
*중대광 문하시중 동지밀직제학 문성공.(重大匡門下侍中 同知密直提學文成公).
문과에 급제하시어 문하시중 동지밀제학 평의사내사령을 역임하시고 문성의 시호를 받으셨다.
일설에 이르기를 공의 아우 3인이 있어
희륜(希倫)은 태자첨사(太子詹事)이며,
희준(希準)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요,
희충(希忠)은 보승장군(保勝將軍)이라 한다.
|
1084(선종 1)년 문과 급제,
|
고려(高麗)
|
금천공(錦川公) 諱 복민(福民)
*정2품(正2品)*
|
*금천군사 동정결추위.
(判錦川郡事同正潔樞尉).
금천군사를 지내셨으며 동정결추위이시다.
|
1144(인종 22)년
|
한림공(翰林公)
諱 창서(彰瑞)
*정4품(正4品)*
|
*문과장원 봉상대부 한림학사.
(文科試壯元奉常大夫翰林學士).
강남학자로서 작문짓는데는 그 위에 올라 설 선비가 없을정도로 출중하셨으며 문과에 장원급제하시어 한림학사가 되시다.
|
1211(희종 7)년
|
대
|
동명성제
(東明聖帝
BC58년
~BC19SUS)
|
고주몽의 선조는 단제의 일파인 해모수(解慕漱)로
단제조선(檀帝朝鮮 -君이 아닌 帝이다.)의 뒤를 이어
오가를 통합하고 삼사(三師)의 추대로 단제가 된 성군(聖君)이다.
후 나라를 안정시킴에 있어 단제조선을 부여라 명칭하고
이로써 부여국의 단제가 되었다.
동명은 해모수의 후손으로 성은 高-(本姓은 ?), 휘는 주몽. 동부여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주 - 단군은 치우천황을 이은 나라고 해모수 및 고주몽은 단군을 이었음으로
해모수나 고주몽의 해나 고는 성이 아닌 호로 봄이 합당하다.
고구려인들은 높다 크다의 의미인 고(高)를 호로 많이 삼았을 뿐
원성(姓)과 명(名)은 가려져 있는 것이다.
현재의 무가치한 사학자들은 이 점을 망각하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원성명보다 호를 많이 사용하였음으로
응당 고구려의 얼이 남아있다 할 것이다.
중국도 고구려식 자(字)호(號)법을 배워갔을 뿐임을...
호와 자를 왜 썼어야했는지조차 모르는 망자들에게
역사는 그저 무의미한 껍질에 불과할 뿐이다.
|
유리명(열)제(榴璃明帝)
(BC19년~18년)
|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제 아들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제위 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제위 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 |
3대
|
대무신제(大武神帝 4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
4대
|
민중원제(閔中元帝44년~48년)
|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제의 동생. 대무신제가 죽은 후
태자의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
5대
|
모본제(慕本帝48년~53년)
|
대무신왕의 아들. 이름은 해우(解憂), 해애루(解愛婁). 민중원제의 형.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杜魯)에게 피살됨
破天荒 주 - 고구려인들의 성품이 고스란히 묻어난 듯 하다.
자격없는 자가 정권을 잡으면 목숨을 걸고라도 친다.
고귀한 희생정신의 결과로 후일 엄청난 철인들이
고구려열제의 자리에 앉아 천하대제국을 일군 밑바탕이 된 건 아닌지...
|
6대
|
태조(太祖,國祖열제國祖烈帝)
(47년~165년)
|
유리왕의 손자로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열제(烈帝)가 됨
고구려백성들로부터 태조(太祖)라 칭해짐
|
7대
|
차대왕
(71년~165년)
|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
신대왕
(165~179)
|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
고국천왕
(179~197)
|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 |
산상왕
(197∼227)
|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 |
11대
|
동천왕
(227∼248)
|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
12대
|
중천왕
(248∼270)
|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
13대
|
서천왕
(270∼292)
|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
14대
|
봉상왕
(292∼300)
|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
15대
|
미천왕
(300∼331)
|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
16대
|
고국원제(故國原帝, 331~371)
|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이 때부터 고구려인들의 신라와 더불어 백제와의 적개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고구려인들의 전력이
한반도로 분산되어 한민족 힘의 약화를 불러왔다.
|
17대
|
소수림제(小獸林帝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제 아들.
제위 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이 때부터 한민족 고유의 신선(神仙)사상과 불교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과도기를 이룸
|
18대
|
고국양제(故國壤, 384~391)
|
휘는 이련(伊連). 고구려 선조들의 얼을 이어받아 북방 세력들을 몰아내어 요동을 정벌하였으며 아울러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
19대
|
광개토대제(廣開土大帝,375~413)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 |
고국양제의 장남. 휘는 담덕(談德). 천손족(天孫族) 고유의
신선도(神仙道)와 융합된 고구려식불교를 신봉하였고,
조상 치우천황 때의 영토를 회복하려 19세의 나이로
전쟁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섬,
이후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북으로는 만주와 거란 및 연나라를 정복하고
남으로는 신라,가야 ,백제의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신하로 삼고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백제와 신라의 왕권은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어
고구려 천손과의 혈맥이 썩이는 것을 원치않았으며
왜(倭)를 견재하는 상책을 택함
호태왕(好太), 영락대왕(永樂).
열제(烈帝)라는 칭호를 얻었음.
연호 영락(永樂)
|
20대
|
장수대제(長壽大帝, 394~490)
-장수홍제호태열제- (長壽弘濟好太烈帝) |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제 맏아들.
북방정책을 감행하여 치우천황 때의 영토의 2/3를 확보한
광개토대왕의 얼을 이어받아 대륙확장에 힘을 쏟았으며,
배은망덕한 남쪽의 신라와 백제 정벌을 감행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帝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고. 제위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이후 일본과 거란 동부여 대륙을 잇는
중심국가로의 네트워크를 확립함
|
21대
|
문자명제(文咨明帝, ?~519)
-문자호태열제- (文咨好太烈帝) |
휘는 나운(羅雲),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제위 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초강대국으로 발전함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연호 명치(明治)
|
22대
|
안장제(安藏帝)(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명제의 맏아들.
치세 12년간 백제와 두차례 싸울 뿐 전쟁을 극히 회피하고
고구려 문화발전에만 전력함
겸손의 극치를 이룸
|
23대
|
안원제(安原帝)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제의 아우.
치세는 14년간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는 등
고구려의 안정에 힘씀.
|
24대
|
양원제(陽原帝)(545∼559)
|
휘는 평성(平成).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고구려를 침략하는 돌궐의 침입을 많이 격퇴 하였으나
이로인해 고구려의 전력을 북방으로 쏟아
남방한계선을 허술하게 대처해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
25대
|
평원제(平原帝, 559~590)
-평강상호태열제 (平岡上好太烈帝) |
휘는 양성(陽城).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자신의 딸인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장군의 오작교사랑등
민간에 전파된 고구려인식 사랑등장
온달장군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함
|
26대
|
영양제(瓔陽帝, 590~618)
-영양무원호태열제(瓔陽武元好太烈帝) |
휘는 원(元). 평원왕의 태자.
帝 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신라의 꽴에 넘어간
수황제가 고구려에 조공하라는 거만한 서찰을 보내옴
598년 분노한 강이식장군을 보내니 강장군은
고구려 정예가 아닌
단지 말갈 군사 1만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니 기다리기라도 한듯
강이식장군이 고구려 철갑기병 5만을 대동하고 격퇴
전멸시켜버림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강이식장군과 부장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다시
적을 섬멸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높힘
이후 중국은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섬
|
27대
|
영류제(榮留帝,618~641)
-고성제(高成帝) |
휘는 건무(建武). 영양왕의 이복동생.
외교수안을 발휘하여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고구려백성들을 되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천리장성 축조는 고구려 때부터였음.
중국식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여 고구려에 전파함.
연나라 후손인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역시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
28대
|
보장제(寶藏帝)
(642∼668)
|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전쟁에 지친 고구려인들이
성문을 열어주어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제는 당나라로 압송됨
수나라 당나라를 거친 72년간의 기나긴 전쟁의 여파로
동이족 치우천황 때의 역사사서 및 활약한 장군들의 함자들이
당고종을 위시한 이세적(李世勣) 및 신라범족들의
역사말살정책으로 모조리 불태워지고 왜곡됨
후일 고구려의 뒤를 이어 해동성국 발해와 고려로 이어져
고구려를 위협하던 거란을 고구려의 직손들인
고려의 강감찬 강민첨장군이 기어이 소멸시켜 버림
지금 남아있는 건 모조리 당과 신라로 인해 자행된
사대주의적 왜곡된 역사서들임
고구려의 광대한 기상과 역사가 한반도내로 전락하여
현재의 약소민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
시대
| 품계(品階) | 관명(官名) |
내용
| |||
高句麗
|
비정1품(比正1品).
|
대대로(大對盧),
-
고구려 국정을 관리하는 최고의 관등.
귀족회의에서 선출되며 왕은 대대로의 선임에 개입하지 못했다.
임기는 3년이나 현명한 인물, 혹은 독재자인 경우에는 얼마든지 그 임기를 연장할 수 있었다.
| ||||
비종1품(比從1品).
|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리지(文官:莫離支),
대모달(武官:大模達=대당주(大幢主))ㅡ강이식(姜以式)
고구려 최고의 무관 관직
수도의 방위와 고구려지휘부
중앙군을 지휘통솔감독
| |||||
비정2품(比正2品).
|
태대형(太大兄)
-족장(族長)들의 수장
구정관장자로 유력귀족가문의 대표가 차지하였으며, 특히 군사권을 쥐고있던 관직
| |||||
高句麗
|
비정3품(比正3品).
|
대부사자(大夫使者),
태대사자(太大使者)
| ||||
비종3품(比從3品).
|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행정권, 인사권, 군사권의 행사를 독점
국가 기밀,개법(改法),징발(徵發),관작(官爵)수여등을 맡음
|
高句麗
|
비정4품(比正41品).
|
대사자(大使者),태사자(太使者)
-국왕 직속의 것과 귀족인 제가(諸加
| |
비정5품(比正5品).
|
대형가(大兄加=대형),힐지(纈支),
의후자(意侯者)
| ||
비종5품(比從5品).
|
발위사자(拔位使者)
-수취나 교역을 담당
| ||
高句麗
|
비정6품(比正6品).
|
상위사자(上位使者),결건사(決達奢) -
조부(租賦)를 총괄하는 관리
| |
비종6품(比從6品).
|
사자(使者),을시(乙蓍)
-대가의 밑에서 재물의 출납을 관리하는 관직
|
高句麗
|
비정7품(比正7品).
|
高句麗
|
비종9품(比從91品).
|
소 재 지 : 진주시 상봉동 972-2
|
. 봉산사鳳山祠 연혁(沿革) -서기 950년대인 고려 광종때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구전됨 -1570년(선조3) 봉곡촌에 사당 건립 -1593년(선조26)6월 임진란으로 소실 -1714(숙종42)대봉산 밑에 사당 중건 -1802년(순조2) 화재로 소실 -1911년 선대 어른들이 합심하여 봉란대 동북쪽 봉서동에 대지를 마련하고 다시 사당을 중건하였으나 왜정치하에서 철폐됨 -1920년 일제하에 국유지가 된 것을 종중에서 매입 1921년(신유)사당 건립 -1940년(경진) 토지 수용령에 의거 철거된 것을 후손들이 봉지옆 예전 봉암이 있던 자리 위쪽에 대지 200여평을 마련 이전함. -1974년 12월 중순 일본거주 계중(桂重) 현종이 시조사를 참배하고, 사당이 협소하고 노후된 것을 보고 재건키로 결심 일본에 건너가 일본 일가들과 재건 협의, 한화 3억5천만원으로 사우 재건하기로 결정 1976년 5월 29일 기공식 거행(대지 4957평 건물 : 본전 82평, 박물관 68평, 외삼문 18평, 대삼물 15평, 화장실 10평, 구사당 8평, 전체 190평) 1978년 7월 25일 봉산사 재건 추진위원회 진주강씨 중앙종친회 사단법인 강이식 장군 숭모회 공동 명의로 문화공보부를 통해 정부에 기증함(공정 76.1% 진척 소요금액 437,55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