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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2일 수요일

日本 유교(儒敎之父)의 아버지 강항(姜沆 姜コウ, カン・ハン/きょう-こう)

日本 유교(儒敎)의 아버지 강항(姜沆 姜コウ, カン・ハン/きょう-こう)

호: 태초(太初), 수은(睡隱), 사숙재(私淑齋)

본관진주(晉州) 박사공파 

조선시대 교서관박사,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

저작운제록, 강감회요, 좌씨정화, 간양록(看羊錄)

姜沆(1567年5月17日-1618年5月6日)字太初,号睡隐。朝鲜王朝中期的官员
姜沆字太初,号睡隐。朝鲜王朝中期的官员。于1597年万历朝鲜战争爆发之际担任刑曹佐郎的要职,姜沆一族在避难中被骚扰黄海沿岸的日本水军藤堂高虎部俘虏,送往日本
1593年文科合格,并于1597年万历朝鲜战争爆发之际担任刑曹佐郎的要职,负责向全罗道的明朝将领杨元运送粮食。然而日军进攻并破坏了朝鲜军的防线。鸣梁海战之后,姜沆一族在避难中被骚扰黄海沿岸的日本水军藤堂高虎部俘虏,送往日本。
在日本期间,姜沆最初被关押在伊予大洲,后来迁往伏见。在此期间他同日本儒学学者藤原惺窝交流中,对其朱子学的体系化大为感慨。在大约三年的俘虏生活见闻中,他将日本的制度和情势记录下来,写成《看羊录》。该书对日本的国情、国土特征、各大名的情形有着详细记载。
1600年4月,姜沆被释放,经对马岛归国,再次在朝鲜当官。许多人仰慕姜沆的文才,投奔其门下,姜沆的门人辈出.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오복(姜五福), 아버지는 강극검(姜克儉),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 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 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조선은 강항을 일본의 포로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대하여 대구교수(大邱敎授)라는 말단직책에 임명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 또 다시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 시절 강항선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필자는 능히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선조인 통계공 강회중할아버지의 강직과 절개를 연상케한다.
선비정신을 한반도에선 고집이라 무시하는 종들이 설쳐대지만
그 고집이 아니었더라면 한반도는 작금 존재할 수조차 없으리..
깨달은 자들만 알고 있으리..)
각략!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근사속록(近思續錄)』·『근사별록(近思別錄)』·『통서(通書)』·『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참조자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수은집(睡隱集)
동토집(童土集)
간양록(看羊錄)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Japan by Kang Hang,Prisoner of War ( Ha Tai Kim ,『백낙준박사회갑기념국학논총』,1955)
日本朱子學と朝鮮  (阿部吉雄, 日本東京大學出版會, 1965)

1593年、朝鮮王朝における文科に合格したが、1597年(慶長8年)の慶長の役(丁酉再乱)では刑曹佐郎という要職に就いており、全羅道で明の将軍・楊元への食糧輸送任務に従事していた。しかし日本軍の進撃によって全羅道戦線が崩壊し、一族で避難中に鳴梁海戦後に黄海沿岸へ進出していた藤堂高虎の水軍により捕虜とされ、海路日本へ移送された。

日本では伊予国大洲に拘留され、のち伏見に移され、この頃に藤原惺窩と交流した。約3年にわたる俘虜生活の見聞(日本制度や情勢)は『看羊録』にまとめられた。 1600年(慶長5年)4月に伏見を立ち、対馬を経由して朝鮮に帰国したが、再び仕官はしなかった。


『看羊録』は彼が日本で見聞したこと、日本の内情や国土の特徴、諸大名の情勢などを細かく記したもので、朝鮮王朝に対する提言集的な側面が強い。

一方、『看羊録』は見聞の中での様々な情動を見事な漢詩にしている[1]。日本について、「日本はどんな才能、どんな物であっても必ず天下一を掲げる。壁塗り、屋根ふきなどにも天下一の肩書が付けば、多額の金銀が投じられるのは普通だ」と綴っている。

朝鮮日報は自国ではつまらないと判断されやすい「技」にも日本には当時から「天下一」があり、それが認められると権威となり、国民がそれを評価して相応の報酬が支払われる社会だったという意味だと解説しており、日本の自営業が400年以上、そうした土壌で成長したと述べいる。

姜が讃えるそんな日本の自営業ですら、人口減少、高齢化、新世代の価値観変化で縮小しているのに、それより厳しいのに政府が逆効果の政策を推進していることによる韓国の自営業の展望に警鐘を鳴らしている[

간양록(看羊錄)

적중봉소(적중에서 올리는 상소)라고 하여

일본의 형세와 조선의 국방정책을 비교하여 기록하는 상소.

적중견문록(적중에서 듣고 본 것을 쓴 글)

왜국팔도육십육주도 등 지도를 싣고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첨부.


고부인격(포로들에게 고하는 격서)

적지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서. 용기와 희망을 북돋기 위한 글.


섭란사적(난리를 겪은 사적)

포로 시절부터 귀국했을 때까지 쓴 일기, 환란 생활의 전말을 기록


특히 임진왜란에 출병한 왜장의 이름, 관계, 행적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그들 사이의 이해와 대립관계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간약록은 왜군에 대한 복수심과 그 결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허나 이런 귀중한 정보를 담은 서책을 조선은 제대로 활용하지 조차 못하였다.


<간양록>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 있는 처지에서도 선비의 정신으로

일본의 지리와 내정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인 1656년에 제자 윤순거 등이 펴냈다.

서원 뒤쪽으로 돌아 산을 올라가면 강항과 두 아내의 무덤이 있으며, 주변 산기슭에는 강씨 문중의 무덤이 여러 기가 있다.

첫 아내가 죽은 후 맞아들인 두번째 아내 함평 이씨는 강항이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하여 뒤를 따랐는데,
내산서원 입구의 정려문은 그 부인에게 내려진 것이다.

형제·가솔들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가
日 學僧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조선성리학 전수
하야시 라잔·야마자키 안사이가 학문경지 넓혀

사유·논증 깊어진 日학자들 서양학문 쉽게 수용
결과적으로 강항이 전한 성리학 日 근대화 촉진
강항, 억류 시 倭 내부정보 조선에 은밀히 전달
풀려나 조선에 돌아온 뒤 후학들 가르치며 은거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함으로써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小學)>·<근사록

(近思錄)>·<근사속록(近思續錄)>·<근사별록((近思別錄)>·<통서(通書)>·<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

(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역사적 의의

조총을 생산해 군사강국이 된 일본은 임진·정유재란을 통해 문화강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수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일본의 학문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수은 강항 선생이다. 

일본인들은 강항선생이 소개하는 성리학의 학문세계에 빠져들었다. 
일본학자들은 사유와 변증, 그리고 논쟁을 통해 성리학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실사구시 형 성리학을 만들어냈다. 
깊은 사유와 실천적 기질을 갖게된 일본 학자들은 네덜란드 선박을 통해 들어온 서양문물과 학문(蘭學)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여 일본화 시켰다. 
결과적으로는 강항 선생이 일본에 전한 성리학이 일본의 근대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강항 일가족을 바다에서 붙잡은 왜군의 장수는 도도 다카토라였다. 
그의 영지(領地)는 오쓰(大津)였는데, 나가하마에서 오쓰까지의 거리는 15km정도였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강항이 학문이 깊은 선비임을 곧 알아챘다. 
그래서 다카토라는 강항과 가족을 오쓰에서 오사카(大阪)을 경유해 후시미(伏見)로 데려갔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었다. 

후시미에서 강항은 학승(學僧) 순수좌(舜首座:후에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로 개명)를 만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조선 통신사 등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강항을 통해 유학(儒學)의 깊은 경지를 접한 순수좌는 승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유학(儒學)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강항과 형제들은 후지하라 세이카의 부탁에 따라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했다. 
또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四書)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五經)과 소학,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 통서, 정몽(正蒙) 등을 필사(筆寫)해 수진본(袖珍本: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만들었다.

강항을 통해 일본 땅에 뿌려진 성리학은 일본 학문이 번영하게 된 뿌리가 됐다. 
일본 학문에 다양성을 더했고 일본인들이 쉽게 학문세계에 접할 수 있게끔 했다. 
일본인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근대화과정에서 대단한 원동력이 됐다. 
결국 강항이 전수한 성리학의 진수와 학문에의 용이한 접근성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정신적 원천이 됐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 그리고 다른 길...


성리학에 갇힌 조선, 허약한 나라가 되다

이에 반해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학문으로만 여겼다. 
성리학은 조선의 정신문화를 찬란하게 피우게 했다. 
하지만 공리공론 적 성격이 갈수록 커졌다. 

학문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편리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지만 조선 성리학은 그러질 못했다. 
주자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주장과 행동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斯文亂賊)이 됐다. 
문(文)은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무(武)와 상(商)은 천한 것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모든 가치관을 중국에 맞췄다. 
중국에서 들어온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돈을 버는 일은 천한 것으로 폄훼됐다. 
조선은 상업과 공업을 억압하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다. 
조선 팔도의 금·은광은 폐쇄됐으며 시장을 여는 것도 금지됐다.
일본의 정신문화룰 바꾼 일본의 개벽자들..!
(강항선조의 제자가 된 일본인들..)


내산서원(문화재 제28호)





내산서원은 1635년(인조 13)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을 사액 받았다. 
1702년(숙종 28)에 중수됐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7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1977년 10월 20일 전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됐다.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

홍유강항비. 일본 에히메 현 오쓰 시에 가면 강 항을 기리는 현창비가 있다. 
화강석으로 된 비면에는 ‘홍유(鴻儒) 강항(姜沆) 현창비(顯彰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하단에는 검은 오석판에 강항의 연보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구례에 장절비(奬節碑)기 세워졌으며,

일본 大洲市(대주시)에 현창바가 있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일본의 정치·군사 정보를 수집해서 '간양록(看羊錄)'을, 강우성(康遇聖)은 포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어 교과서 '첩해신어(捷解新語)'를 만들었다. 류성룡(柳成龍)도 이 비극의 기억을 '징비록(懲毖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참혹한 전쟁의 경험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귀중한 정보로 승화시킨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만주어 교과서인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 또한 병자호란 뒤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이 책을 저술했다는 것을 이 땅 몇명이나 알고 있을까?

불세출! 고귀한 선비정신 강항선조의 내산서원 경취~!








조선 후기 양반들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관계를 대내외적으로 애써 숨기고 명나라라는 유령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이런 양반들이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 삶을 재료 삼아 귀중한 유산을 후세에 남긴 전쟁 포로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큰 인물들을 망각한 작금 한반도의 인간들은 어떠한 몰골인가?

배은망덕의 죄는 어떠한 형세로든 반드시 돌아가리라 필자는 내다보고 있다.

by unprecedentedness 眞風流士 破天荒 筆

정유재란 慶長けいちょうの役えき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어: 豊臣秀吉, 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정치가이며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 3영걸로 불린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임진왜란을 이으면 죽고 죽이는 것만 따져도 근8년간 이어진 전쟁이었다.
이순신(덕성이씨)장군의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승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전투는 거의 없고 거즘 학살된 교착전쟁의 모습을 나타낸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전을 안겨준 이순신장군도 배은망덕 전주계 이씨정권및 간신,오리배들에의해 결국 피해를 입은 장본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 전쟁(慶長けいちょうの役えき 게이초노에키)이라고 부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어: 豊臣秀吉, 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정치가이며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 3영걸로 불린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정유재란이 끝난 이유!
조명연합군이 강해서? 착각마라..
간단하다..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죽음 때문...

도요토미씨(豊臣氏)-도요토미씨(豊臣氏)는 고대 일본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姓이 없이 氏를 족표로 삼는 민족이다.
가바네는 아손(朝臣)으로, 흔히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정치인이자 군사전략가로써 센고쿠 시대를 사실상 종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족을 뜻한다.

후지와라 세이카

세이쇼 죠타이


鍋島直茂(なべしま-なおしげ)나베시마 나오시게


藤原惺窩(ふじわら-せいか)후지와라 세이카
일본은 강항선생이 전한 성리학을 토대로 학문의 세계를 넓혀 서양학문을 성공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개화(근대화)에도 성공했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공리공론 적 유교논리에 갇혀 있었다. 
폐쇄적 학문은 세계의 변혁에도 눈을 감게 했다. 
중국 대륙만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과 쇄국정책은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p:s~
조선 후기 양반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관계를 대내외적으로 애써 숨기고 명나라라는 유령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전형적인 사대주의)
이런 양반들이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 삶을 재료 삼아 귀중한 유산을 후세에 남긴 전쟁 포로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진정한 살신성인의 큰 인물들을 망각한 작금 한반도의 인간들은 어떠한 몰골인가?

배은망덕의 죄는 그 어떠한 형세로든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리라 필자는 내다보고 있다.

한반도인의 배은망덕함은 이미 지옥을 뚫었음을 필자는 깨달은지 오래다.
결론은 주어지리...
pp:s 선비 강항의 고마움을 잊지않고 몸소 행동으로 전하는 은혜를 아는
진정한 일본인들.. (일본은 최소 그 어떤 족속들처럼 배은망덕한 민족은 아니다)


by unprecedentedness 眞風流士 破天荒 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