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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3일 토요일

東夷族之 始祖 염제신농(炎帝神農) 강석년천제(姜石年天帝) 괴(魁) 전략(傳略)

인류문명의 개조 염제신농 강석년천제(姜石年天帝) 괴(魁)



炎帝 神農氏 炎帝神農氏 傳說中的上古帝王神農氏。因以火德王,

故稱?炎帝。繼女?後?天下共主,

傳說是農耕和醫藥的發明者,又創造五弦瑟,

開始蠟祭和市場.自他以後中國進入農耕社會 



姜姓의 由來와 史蹟

姜 珍 遠 著

著 者 刊 行

동이족(東夷族)의 시조 염제신농 강석년천제(姜石年天帝)
鳳의 효시


염제신농(炎帝神農)!!!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의 임금이요,농사의 신이다.

왜 하필이면 불과 농사의 신이 되었을까?



물론 자신의 자질과 능력이 뛰어났던 것도 있겠지만

보다 뛰어나신 조상님들의 은덕도 존재했던 것임을 알 수 있도다.

우리 후손들이 숭조(崇祖)를 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염제신농 -> 배달국 유웅국시조 소전 ㅡ> 배달고시씨(高矢氏)



조상 고시씨가 벌써 배달국의 곡식을 담당하는 가문에 계셨다.

우리가 흔히 "고시례"라 하며 음식을 세조각으로 떼내어 천지에 뿌리는 이유는 천하 어디에나 있는 고시례의 은덕에 보답키 위한 예례로 

동이천손문화에 깊숙히 뿌리 박혀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배달국은 강씨의 씨족국가로 씨족들이 벼슬을 담당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염제신농의 本族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통동이족으로 동방홍삼문화와 중원 황하문명을 일군 겨레로 평가할 수 있고,지금으로부터 5300여년 전 성씨를 처음 개칭한 이래 동서방의 성씨원조로 통한다.

한반도에서 성씨가 문화화 된 것은 이로부터 3000년 후에의 일이니

신농의 덕화(德化)를 가히 알 수 있다.

염제신농 본족잉태처 바이칼호수

한글자막 체크~!
炎帝神農氏

신농(神農)의 탄생 

* 神農朝鮮國初代君主炎帝神農

강성(姜姓)의 개시원조(開始元祖)시며 중국 상고시대 삼황오제(三皇五帝) 中

삼황(三皇)의 한 분이시다.



부친은 소전유웅국(小典有熊國)의 군주(君主)이시고

모친은 제후(諸侯) 임기(任己)라고 하며 안등(安登) 또는 여등(女登)이라고도 한다.



모친은 소전군주의 정비(正妃)로써 화양(華陽=현재 西華山) 땅에 계실 때



상양산(常羊山) 신룡(神龍)의 태몽으로 수태하고 신농동석실(神農洞石室)에서

서기전 3218년 4월 26일에 신자(神子)를 출생하니 인면용안(人面龍眼)에

인신우두(人身牛頭)를 가지셨으며 신체가 괴위(魁偉)하여 이름을 괴(魁)라고 하셨다.



중국에서는 이 날을 신농선제만세(神農先帝萬歲),농황정제전(農皇定祭奠),

곡선제천추제사(穀先帝千秋祭祀),농역기원(農歷紀元)일로 정하여 전 국민이

제사드리는 날이기도 하다.


염제신농씨는 성장지가 강수(姜水)라 해서 姓을 姜이라 하셨으며

우리 강성의 개시원조 이래 5200여년의 상계에 이른 것이다.



나시면서 성인(聖人)이시어 구룡(九龍)등의 두 분 사부를 모시고 일만약초를 처음

맛 보실 때 독초(毒草)의 독으로 하루에도 무수히 생사를 거듭하셨으니

천자(天子)로써 자신의 생명보다 백성과 세상을 구한다는 일렴으로 백초를 맛보았으니

시공(是空) 전,후를 통하여 이런 어진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生 일남일녀를 두셨으니 천자(天子)는 임괴(臨魁)이시고 천녀(天女)는 정위(精衛)이시다.

태호복희씨는 제업(帝業)의 뒤를 이어 歲 23세에 천자위를 계승하여 처음 국도(國都)를

진(陳)에 세우셨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으로 제(帝)가 되시니 천하를 통치함에 염제(炎帝)라 칭하고,

화기관(火紀官)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농사법(農事法)을 가르치시고 다스리시며

존칭으로 인황(人皇)이라 하셨다.



신호(身號)는 염제(炎帝),세호(世號)는 신농(神農)이라 하시고, 도읍을

산동곡부(山東曲부)로 옮기면서 120년(혹140년)을 제위하셨고,후로 7대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하면서 신농(神農)의 호(號)를 쓰고 380년간을 천하를 다스리시니

도합 520여년을 지내오면서 신농의 천하라 하겠다.





炎帝神農氏

有熊國第二代君主兼神農朝鮮國初代君主炎帝神農創始的科學實驗家

東夷族之始祖西土之法道而同新市室於姜水因爲姓氏伏義甲申以火德王

在位百四十年都於陳朝干長沙人流姓氏之祖正妃奔水氏之女息而聽談

一子一女出天子而臨魁天女而精衛



소전의 제위를 계승하시어 창시적과학실험가(創始的科學實驗家)로서 서토의 법도를 신시(新市)와 같게 하셨으며,동이족(東夷族)의 시조가 되시었다.



도읍을 진(陳)에 세우시고 봉황으로 수호를 하셨으며 소전의 묘에 제사하며

묘를 지키셨다.

려산진신농동석실(慮山鎭神農洞石室)에서 BC3218년 4월26일에 탄강하셨으며 甲申에 화덕(火德)으로 제위에 오르셔서 제(帝)를 처음으로 칭하셨다.



강수(姜水)에서 자라서 성(姓)을 강(姜)이라 하셨으니 이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姓)이 탄생한것이다.



성의 효시로서 아우 공손(公孫)에게 희(姬)를 성으로 내려주니 이로써 성이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헌원에게 유웅국(有熊國)을 잇게 하시고 천군(天軍)을 이끌고 도읍을 곡부(曲阜)로 옮기시니 이 나라가 바로 신농의 동이족(神農之東夷族)이다.



공손은 석년에게 받은 희를 성으로 삼았으니 희성(姬姓)이 생기는 이유가 되었다.후 헌원 언덕에 정착하여 헌원(軒轅)을 호(世號)로 삼아 유웅국(有熊國) 제 3대 군주에 등극하니 이가 곧 헌원의 서이족(軒轅之西夷族)이다.



신농의 동이족은 괴(魁)를 세호로 삼아 동이족의 시조가 되었으며,헌원의 서이족은 헌원(軒轅)을 세호로 삼고 서토 지나인들을 규합하여 후일 한족(漢族)의 시조로 추앙받게 된다.



성(姓)은 천자(天子)가 주는 것이며 씨(氏)는 성을 받은 제후(帝侯)가 퍼트리는 것이니 이로써 성이 천하에 만연되는 원인이 되었다.



석년의 정비(正妃)는 분수씨(奔水氏)의 여식(女息)으로 청담(聽談)이라 하며 生 一子一女를 두시니 천자(天子)는 임괴(臨魁)이시고 천녀(天女)는 정위(精衛)이시다.



후일 임괴가 신농조선국 제 2대 제에 등극하니 이가 곧 제승(帝承)이다.

이 나라가 8대 520년을 이었으며 8대 제황인 유망(瑜罔)에 이르러 헌원과 전쟁을 치루게 되며 전쟁에서 패한 유망의 제족(帝族)들은 배달국 치우와 힘을 합하여 헌원을 물리치고 단웅국(檀熊國)의 새 장을 열게 된다.



이 단웅국(檀熊國)에서 후일 수 천년 단제조선(檀帝朝鮮)의 기나긴 역사를 펴는 단제왕검(檀帝王儉)이 탄생한다.



단제왕검(檀帝王儉)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炎帝神農 (姜石年=괴(魁))
             
      *신농조선국 초대군주 동이족시조*

    (神農朝鮮國初代君主東夷族之始祖)


             강성(姜姓) 득성조(得姓祖)



創始的科學實驗家神農朝鮮國初代君主炎帝神農東夷族之始祖西土之法道而同新市室於姜水因爲姓氏伏義甲申以火德王在位百四十年都於陳朝干長沙人流姓氏之祖正妃奔水氏之女息而聽談一子一女出.


名:석년(石年),괴(魁),출생지:강수(姜水),

BC3178년 출생,3060년 제황득위(帝皇得位)

재위 140년,壽180歲,8대 530년 존속

신물 봉황(鳳凰),도읍:진(陳),곡부(曲阜) 



동이족의 시조(東夷族之始祖),성씨의 시조

불의신(神),농사의 신(神),화폐의 신(神),

의학의 신(神).태양신(日月神)

웅족출신으로 우양족(牛羊族)의 시조.



사부:실제(悉諸),구룡(九龍)



정비(正妃):청담(聽談)1남1녀



父분수씨(奔水氏)


천자(天子):임괴(臨魁):신농조선국2대제황



천녀(天女):정위(精衛):공손지비(公孫之妃)

유웅국의 제위를 공손에게 내주고 따로이

신농조선국을 세우니 이로써 동이족의 시조가 되셨다.



  
     염능현              본초강목.


▶ 지금부터 2,200여년전 후한시대 장중경(張仲景)이 편찬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그 전에 발간된 의서를 총 집대성한 의서이다.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초대제황 제1대.


염제신농 炎帝神農

B.C3,218~3,070)제위120년혹 140년. 



     *신농조선국 제2대 제황(帝皇).

  諱 제승(帝承)

名 임괴(臨魁) 신농의 아들(神農之子).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신농이 전해준 의학과 농사법,누에치기의 덕으로

아픈자가 없어지고 굶주리지 않았으며 누에로 만든 옷을 입게 되어 추위를 해결하게 되니 천하가 태평성대해졌다.     



 B.C3070~2925

 재위60년

  

諱 제임(帝臨)

  *신농조선국 제3대 제황(帝皇)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제승(承)에 이어 괴(魁)를 세호로 삼았다.

 제3대.



BC3011~2951

재위60년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諱제측(帝側=직(稷))



  *신농조선국 제4대 제황(帝皇).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벼와 보리 농사가 활발해져 전 백성이 풍족해졌다.


제4대 BC2951~2902

재위49년



諱 제백(帝百)

  *신농조선국 제5대 제황(帝皇)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자손들이 봉지를 하사 받고 천하각지로 떠나 나라를 열다.

 제5대BC2902~2857

제5대 재위45년



 諱 제리(帝裏)

*신농조선국 제6대 제황(帝皇).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두(杜=炎帝別子有聖德佐帝播種後世祀以爲稷)염제의 별자로 성스러운 덕이있어 제(裏)를 도와 후세로 位를 계승하였다. 

파종(播種)을 하며 후세로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다. ->경갑(慶甲).


제6대BC2857~2809

재위48년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단웅국(檀熊國=청구국=靑丘國)




諱 절경(節經) 

*신농조선국 제7대 제황(帝皇)

연호=신농(神農),신물 봉황(鳳凰),



제양(帝襄=제애)때에

배달국 치우가문의 강씨(姜氏)여인과 혼인.



장자 극(克). 차자 희(戱)- 장당(티벳)과 인도(아리아인)으로 나뉨. 제7대 BC2809~2766 재위43년


치우비(蚩尤碑) 諱 희(戱) 

*절경지자(節經之子) 

절경의 아들로 제위(帝位)를 유망에게 양보하고 강족(姜族)의 계보를 이었다. 


ㅡ>극(克=節經及克不得承帝任)


ㅡ> (檀熊國=단군조선)으로 이어짐.

 세보보기=>제유망(帝楡罔) 이후 연대.








헌원이 난을 지으니 유망과 치우가 힘을 합해 토벌하였다.배달국과 신농조선국이 통합되어 단웅국(檀熊國=단군조선)으로 이어짐.

                


         치우강자오지(蚩尤姜慈烏支)

전쟁의 신(神),구려(九麗)의 우두머리(牛頭)

중원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치우천황이 신농계와 헌원계를 번갈아 다스리게 함. 



염제유망과 치우는 전쟁을 치룬 적이 없다!!!


염제신농과 유망 그리고 치우도 구분 못하는 비천한 쓰레기들이 많은 땅!



그 따위 자들이 감히 염제신농과 치우를 들먹거리며 되먹지도 않은 망발을 일삼으니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신농과 치우등 조상들에대해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자들이 왜 역사를 오염시키려 환장한 것이냐!


대동이족 고구려인들의 조상 염제신농(炎帝神農) 강석년천제(姜石年天帝)



염제신농의 8세손이 적제 유망으로 이는 중국에서 신농과 구분치 못하는 몇몇 사학자들로 인해

신농과 유망의 구별이 뒤죽 박죽이 되었다.



이것을 빌러 이 땅의 무지한 상놈보다 못한 신라종들이 저희 멋대로

염제유망이 치우와 전쟁을 치뤘다느니 망발을 일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언제 적제 유망이 치우와 전쟁을 치뤘느냐!

치우가 구려의 형제들(姜族)을 끌어모은 이유는 천하를 다스리던 유망의 나라가 헌원에 의해 반쪼가리가나자

천하를 바로 잡자는 의혈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헌원의 제위찬탈이 있기전까진 아시아는 전쟁이란 없는 다시없을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천하광명의 시대를 헌원이 깬 것이다.


치우천황(蚩尤天皇) 강자오지환웅(姜慈烏支桓雄) 



그리고 이후 유망의 제족들과 연합하여 오히려 헌원을 물리치고 유망의 아들인 괴(魁)를 배달국의 뒤를 이은 단웅국(檀熊國) 수도 청구(靑丘)의 제황의 자리에 앉히고 일파가 장당과 남국 그리고 번조선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이 유망의 후손이 웅녀이고 웅녀의 아들이 단군왕검으로 장백산 즉 백두산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단군(帝)조선인 것이다..

한 민족의 뿌리는 이 단군조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군왕검이 남한 땅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던 종족과 융합을 시도하는데 이 종족은 비열하고 음침하고 잔인한 종족이라 은혜를 베풀어 줘고 고마워하기는 커녕 기회만 닿으면 뒤통수 칠 궁리만 하는 비열한 종족이었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그들을 범의 잔인한 특성을 닮았다하여 범족(虎族)이라 이름 지었다.

약한 놈들이 잔인한 법이다..



웅족이 자신들을 스스로 웅족이라 내세운 반면 그 범족들은 웅족들로부터 범족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자들은 지금껏 자신들을 범족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신라라고 하는 족속들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고구려 조의선인들이 말을 타고 범을 사냥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가 아닌 신라범족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비열한 족속들이 수나라 당나라 쌀배달이나 하며 한민족의 역사를 개판내고도

부끄러움을 알기는 커녕 아직 정신 못차리고 고구려의 뿌리인 염제신농과 치우천황의 역사마저

왜곡해대는 작태는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고구려인들의 원적은 수나라와 당나라였지 신라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구려인들에게 있어 신라라고 하는 족속들은 차후 조공만 받으면 그만인

상종못할 종족이었던 것임을 각골명심해야 할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 저 신라종들로인해 단합은 커녕 갈수록 분열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뒈질려면 저희만 뒈지지 왜 애꿏은 이 땅의 백성들마저 분열로 내모는 것이냐!



주제파악 못하고 아직도 동이족의 조상들을 들먹거리며 왜곡해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다시금 저희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꼴임을 알지 못한다.



길게 쓰고 싶지도 않고 이미 가치가 없는 비천한 쓰레기들이 많은 땅이다.

역사를 모르는 무식한 종들은 아예 동이족의 조상들에 대해 욕을 보이지 말고 입을 다물라..



시기가 무르러 읽었을 때 반드시 죄 값을 치루게 되리라..

ㅡ>
웅족(熊族)과 범족(虎族)!


                                                  熊眞子 破天荒 


중국 섬서성 보계시는 염제의 고향이다. 동이족 및 중화민족의 발원지이다.
신농씨는 몽곡에서 태어나고, 강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천대산에서 약채을 구했다.중국 당나라 전 부터 규모가 큰 신농묘, 염제사 등이 있다.
숭고지금(从古至今), 매년 7월 7일은 염제길일(祭日), 천대산의 아름다움과 원시 시조의 풍부한 경관으로서 1994년 2월에 중국 국가급 풍경구로 되었다.



맥적산 석굴

약 50km 북도구 맥적산 향남측에 있다. 서진령산 산맥 중 한좌호봉이다. 맥적산 관광지는 총면적 215k㎢이고 맥적산, 선인얘, 석문. 곡계 4대 풍경구와 거헝고진광녀결이 된다. 맥적산 석굴은 중국4대 석굴 중 하나이다.
중국 4대 석굴(용문석굴·운강석굴·막고석굴) 세계예술의 보고(宝库)이다.


청동기박물관


중국 보계시 청동기박물관은 중국에서 제일 큰 청동기박물관이다.
위치는 중화석고원내에 있다. 박물관에는 청동기가 많아서 청동기 발원지라고도 한다.
주레지방(周礼之邦) 제국의 길, 지혜지광 등을 전시했다. 박물관에는 하존, 적광, 역왕胡簋, 강판, 진공종, 위정 천여개 청동기를 전시했다.



조어대

보계시 동남방향 약 40km 蟠溪河에 있다. 남쪽에는 진령이고 북망은 위수이다.
물이 좋고 고백이 많아서 역사의 기운이 도는 유람성지이다. 성급 중점 보호이고 조어대는 서주강자야가 웅거를 했던 곳이다. 자천 낚시로 문왕을 만났던 곳이다.
당전관년간(太公兵家者流,始令蟠溪立庙) 위치이고 당시 심어놓은 4그루 나무를 심어놓은 것도 아직 남아 있다.
태공묘, 문왕묘, 산문 삼청전 등이 있다. 하동안에  조대유적이 있다.



함양박물관

중국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서안에서 약28km이고 명대 공묘기초에서 확대를 했다. 1962년도 개방하여, 총 면적은 800㎡이고 3000여건을 진열했다.
함양은 진나라의 수도였고 서한과 당나라시대 실크로드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박물관에는 고의적, 고령묘 발굴로 많은 진나라, 한나라 등 진귀한 보물을 발견했다.



감숙천수시수련동

무산현 동북 25km 중산협곡에 있다. 실크로드의 석굴사원이다. 여기는 군봉/접장 기위정발 유수하고 멋진 곳이다. 수렴동 석굴에는 중국(진·위·북위·북주·수·당·5대·송·원) 역대를 이어오면서 수렴동, 라쇼사, 천불동 등 석굴들이 많다. 그 중 라쇼사 막고대불은 42.3m이고 세계 제일 마애대불이다.



하기는 강진원님의 저서 중 일부이다...


"姜姓의 由來와 史蹟" - 順天市 住岩面 杏亭리 八六九 姜珍遠의 1997년 저서로 中國 姜氏(중국 강씨)의 由來(유래)와 史蹟(사적)이 수록되어있다. 중국강씨(中國姜氏)의 시조(始祖)는 소전씨(小典氏)이다.


우리 강성(姜姓)의 유래(由來)에 대하여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5,300여년전인 서력기원전(西曆紀元前:B.C) 3,300년경 저 아득한 중국(中國)태고(太古)시절 소전씨(小典氏)라는 이가 있어 중국(中國)의 서북(西北)쪽 지방(地方) 황하강(黃河江) 상류지역인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오늘날 중국 발음 지명 싼시성) 서쪽에 있는 강수(姜水:일명 기수(岐水)라고도 한다)라는 지방(地方)의 제후〔諸侯:웅국군(熊國君)〕이었는데 그가 다스리는 지명(地名)을 따서 성(姓)을「강(姜)」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전씨(小典氏)가 교씨녀〔嬌氏女:웅녀(熊女)〕와 혼인(婚姻)하여 태어난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長子) 이름은 석년(石年)이요, 차자(次子)이름은 사소전(嗣小典)인데, 장자(長子) 석년(石年)이 바로 태호복희씨제(太昊伏羲氏帝:목덕왕, 풍성제(木德王, 風姓帝) 15代 천자(天子)의 뒤를 이어 화덕왕(火德王) 염제신농씨제(炎帝神農氏齊)를 세운 사람으로 강성천자(姜姓天子)가 8代 520년동안 계속되도록 기틀을 세운 사람이며, 차자(次子) 사소전(嗣小典)은 염제 신농씨제(炎帝 神農氏齊)의 제후(諸侯)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강씨(中國姜氏)의 시조(始祖)는 소전씨(小典氏)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세한 유래와 사적은 아래에 기록된 "中國 姜氏의 由來와 史蹟"?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소전씨(小典氏)의 유래(由來)에 대하여「단기고사(檀奇古史)」및「단군 조선(檀君朝鮮) 47代」라는 책의 기록에 보면「우리겨레인 고시씨(高矢氏)의 후손(後孫)으로 배달나라 8世 환웅 안부련천황〔桓熊 安夫連天皇:B.C 3,240年 신유(辛酉)즉위, B.C 3,167年 갑술(甲戌) 붕어(崩御), 재위 73년〕의 명(命)에 의하여 B.C3,168년(癸酉年)에 강수〔姜水:중국 섬서성 기산현(中國 陝西省 岐山縣)〕에서 군사를 감독하였다. 소전(小典)의 아들이 신농씨(神農氏)이다. 신농씨(神農氏)는 강수(姜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姓을 강씨(姜氏)라고 하였으며 복희씨(伏羲氏)의 여동생 여와( 女瓦 )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중국사료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1956년 경기 파주 출생으로 국립 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한배달’편집인, 민족문화연구원 심백강(沈伯綱) 원장님이 쓰신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를 보면 『“동방문화의 뿌리는 한족(漢族 : 중화민족)이 아니라 한족(韓族 : 한민족 : 옛 東夷族)” 이었다는 것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한족(漢族)의 시조는 황제헌원(黃帝軒轅)씨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황제(黃帝)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漢族)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東夷族)의 시조는 황제(黃帝)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中國)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복희씨(太?伏羲氏)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 姓은 姜)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바로 황제헌원(黃帝軒轅)가 한족(漢族)의 시조이었다.


강태공(姜太公), 맹자(孟子), 묵자(墨子)도 동이족(東夷族)이었다.


그러나 한,당(漢,唐)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東夷)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 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東夷)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고구려패망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朝鮮朝)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亞流)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東夷)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음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 중국연변대 객원교수인 심백강(沈伯綱)선생님의 중국(中國) 청나라(淸 : 大淸帝國) 사료(史料) ‘사고전서(四庫全書)속에 있는 동이사료(東夷史料)’와 필자 강진원(姜珍遠) 저서의 ‘中國 山東省 旅行’발간도서내 ‘동이(東夷)의 터전이었던 중국의 각 민족역사’라는 기술을 통해 ‘중국역사속의 동이사료(東夷史料)’를 요약 서술하면



신화시대(神話時代)인 삼황시대(태호복희, 여왜, 염제신농 : 기원전 3512~기원전 2645), 요순시대(堯舜時代 : 기원전 2357~기원전 2184), 하(夏)나라(기원전 2183~기원전 1751), 역사시대(歷史時代)인 은(殷)나라(기원전 1751~기원전 1121), 주(周)나라 제후국(諸侯國) 제(齊)나라 강씨제(姜氏齊) 29代 729년간(BC 1116년경~BC 387년)는 동이족(東夷族)이었고,



신화시대인 오제시대(황제헌원,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지 : 기원전 2644~기원전 2358), 역사시대인 주(周)나라(기원전 1122~기원전 249), 진(秦)나라(기원전 221~기원전 207), 한나라(漢, 기원전 206년~서기 220년), 수(隋, 서기 581년~617년), 당나라(唐, 서기 618년~907년)나라, 송나라(宋, 서기 960년~1279년), 명나라(明朝, 서기 1368년~1644년), 오늘날 中國은 한족(漢族)이었으며, 청나라(淸 또는 大淸帝國, 서기 1611~1912년)는 만주족 중 여진족(女眞族)이었다.


지금까지 중국(中國) 한족(漢族)으로만 알고 있었던 중국과 한국의 강씨(姜氏)는 시조 소전씨(小典氏, 기원전 3300~기원전 3164), 삼황(三皇)중 한분인 염제신농씨제(炎帝 神農氏齊) 8대 520년간 (기원전 3164~기원전 2644) 황제(皇帝), 오늘날 중국(中國) 산둥 성(산동성, 山東省山, Sh?nd?ng Sh?ng) 주(周)나라 제후(諸侯) 제(齊)나라 강태공(姜太公)이하 강씨제(姜氏齊) 29代 729년간(BC 1116년경~BC 387년)의 공후(公侯 또는 諸侯), 중국(中國) 위진 남북조시대인 서기(西紀) 560년대에 원수공(元帥公) 강이식(姜以式)은 중국(中國) 광동지방(廣東地方)에서 탄생하시어 문무(文武) 겸비한 대군략가로 고구려로 망명한 우리나라 강씨의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서기 560~642)등 모두가 동이족(東夷族)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한민족(韓民族)이다. 따라서 고대(古代) 중국(中國)의 지배계급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 東夷族 姜姓皇帝 8代 520년(BC 3164~BC 2644) 系代·在位期間

① 염제(炎帝) : 정축년(丁丑年, BC 3164年)즉위, 재위 140년간

② 제승(帝承) : 정유년(丁酉年, BC 3024年)즉위, 재위 60년간

③ 제림(帝臨) : 정유년(丁酉年, BC 2964年)즉위, 재위 80년간

④ 제측(帝則) : 정사년(丁巳年, BC 2884年)즉위, 재위 48년간

⑤ 제백(帝百) : 을사년(乙巳年, BC 2836年)즉위, 재위 46년간

⑥ 제래(帝來) : 신묘년(辛卯年, BC 2790年)즉위, 재위 48년간

⑦ 제양(帝襄) : 기묘년(己卯年, BC 2742年)즉위, 재위 43년간

⑧ 제유(帝楡) : 임술년(壬戌年, BC 2699年)즉위, 재위 55년간



소전씨(小典氏)의 생존년대(生存年代)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면 너무 아득한 옛날 일이어서 중국(中國) 고대사서(古代史書)인 한(漢)나라(B.C 202~A.D280年)때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130권을 전문적으로 연구 검토하여 보기전에는 정확한 생존년대(生存年代) 분석이 어렵고, 다만 어림잡아 소전씨(小典氏)의 생존년대(生存年代)를 생각해 보건대 중국(中國) 원(元)나라때 증선지(曾先之)가 지은 사서(史書) 십팔사략(十八史略)의 기록에 의하면



소전씨(小典氏)의 자(子)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천자(天子) 재위기간(在位期間)이 140年間(B.C3164年~B.C3024年)이라고 했으니 그 수(壽)가 170세(歲)정도 되고, 서기(西紀) 729年 우리나라 발해국(渤海國)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록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재위기간(在位期間)이 98年間(B.C2333年~B.C2241年)이라고 했으며 그 수(壽)는 130세(歲)라고 기록하고 있느니 소전씨(小典氏)의 생존기간(生存期間)을 136年間 정도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바, B.C3,300年에 탄생(誕生)하시어 B.C3164年경에 붕어(崩御)하시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참고문헌(參考文獻)

①曾先之.「十八史略」.장충식譯.서울:사단법인 한국자유교양추진회, 1969.

※「十八史略」은 中國 宋나라(A.D960年~A.D1279年)말 元나라(A.D 1206年~A.D1367年)초의 歷史學者「曾先之」가 저술한 中國의 正史 「二十四史」중에서「司馬遷의 史記」에서「托克托의 宋史」까지 약 四千年 동안의 18가지 正史를 요약해서 알기 쉽게 編年體로 엮은 책이다.

元나라는 西紀 1206年 몽고의 成吉思汗(징기스칸)이 건국한 국가이다.

②晋州姜氏 世譜編纂委員會.「晋州姜氏 世譜」.著者 刊行, 1909.

③고동영.「檀君朝鮮 47代」.서울:한뿌리,1986.

※「檀君朝鮮 47代」는 檀奇古史.桓檀古記.揆園史話등 역사책을 참고 하여 가능한 한 原文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桓仁7代 3,301年間(B.C


7199~B.C 3,899). 桓雄18代 1565年間(B.C3898~B.C2334). 檀君朝鮮


47代 2096年間(B.C2333~B.C238)의 歷史를 年代順으로 엮은 우리나라의

上古史이다.

④曹雪芹.「列國志」.鄭汝昌 譯.서울:한국출판문화공사,1986년

※「列國志」는 中國 周나라(B.C1122~B.C249年까지 873年間) 第10代 ?王時代인 B.C 827年부터 秦나라(B.C221~BC207年까지 15年間)마지막 王인 3世 皇帝 子?까지 621年間의 列國의 歷史를 기록한 책이다.

⑤大野勃.「檀奇古史」.著者刊行,渤海國 天統31年(西紀729年).

⑥桂延壽.「桓檀古記」.著者刊行,韓日合倂 이듬해인 辛亥年(西紀1911 年).

⑦北 崖.「揆園史話」.著者刊行,朝鮮第19代 肅宗1年.乙卯年(西紀1675年).

⑧이찬外 7人.「중학교 사회과부도 P40」.서울:주식회사 교학사,1986.

⑨이병설外 5人.「인문계고등학교 사회과부도P55~56」.서울:동아출판사.1979.

⑩姜甲秀.「晋陽姜氏 由來史 P5」.경남진주:일신인쇄소,1960.

⑪安含老.「三聖紀上」.著者刊行,新羅 第27代 善德王 9年(西紀640年).

⑫申采浩.「朝鮮上古史」.서울:一信書籍公社,1986.

※「朝鮮上古史」는 舊韓末 歷史學者인 丹齋「申采浩」先生(1880年~1936年)이 西紀 1918年에 저술한 檀君朝鮮(B.C233年)부터 三國의 한나라인 百濟의 멸망(A.D660年)때까지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⑬晋州姜氏睡隱公派譜編纂委員會.「晋州姜氏睡隱公派譜」.전남장성

:삼성인쇄소,1981.

⑭晋州姜氏御史公派譜編纂委員會.「晋州姜氏御史公派肅宗乙丑譜」.

著者刊行, 朝鮮 第19代 肅宗 乙丑年(西紀 1685年).

⑮晋州姜氏御史公派編纂委員會.「晋州姜氏御史公派英祖丙戌譜」.著者刊行, 朝鮮 第21代 英祖丙戌年(西紀1766年).

中國廣東姜氏譜:中國 南北朝(西紀420~589年)時代에 編纂된 廣東姜氏의 族譜.

西郭雜錄:우리나라 三國時代(B.C57~A.D668年)에 쓴 著者와 年代

未詳의 歷史書.

大東韻海:우리나라 三國時代(B.C57~A.D668年)에 쓴 著者와 年代未詳의

歷史書.

晋州姜氏全羅南道宗會.「晋州姜氏 世系表上編」.光州:正文堂印刷社,1986.

玉川趙氏大同譜編纂委員會.「玉川趙氏文獻考」,著者刊行.1966.


鄭龍國.「새完成國史」.서울:太陽出版社,1974.

이선근.「民族國家의 强靭性」,國防部編,「國軍將校用 政訓誌 第82號

(우리의 힘)」,(서울:國防部,1958年 1月 12日),P20.

金雲泰.吳錫泓,「韓國行政史」.서울:韓國放送通信大學出版部,1990.

「우리나라 姓氏 2百 74個」.「光州日報」,1987.12.25,P1. P6.

姜水의 由來→一名 岐水라고도 하며, 中國 陝西省(중국발음:싼시성)

岐山縣 西쪽과 中國 甘肅省(중국발음:깐쑤성) 東쪽까지 사이에 걸쳐 있는 黃河江 상류의 한 물줄기인 渭水江(중국발음:웨수이강 또는

뤼수이강)가에 위치한 오늘날 中國 甘肅省 天水(중국발음:깐쑤성 텐수이)

地方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姜水를 地名이나 江이름 두가지로 부르기도 한다.

本 資料 考證은 十八史略 P.56?P.71과 檀君朝鮮 47代 P31.P32 그리고 이병설외 5인 著 西紀 1979年 3月 1日 동아출판사 발행 인문계 고등학교 사회과부도 P.55?P.56을 참고로 활용하였다.

小典氏의 由來→小典氏는 B.C3300年경 탄생하시어 B.C3164년에 崩御 하시었는데, 中國의 당시 지명 姜水地方의 작은 나라인 態國의 諸侯

(작은나라의 임금)이었으며, 態國이 아닌 有態國이라고 기록된 책도 있다.

列國志 P.261을 참고자료로 활용하였다.


第2章 火德王 炎帝 神農氏齊의 由來와 史蹟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성(姓)은 강(姜)이고, 본명(本名)은 석년(石年)인데, B.C3200年경 중국(中國) 호북성(湖北省) 수주시(隨州市) 여산진(?山鎭)에서 小典氏(소전씨)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풍성(風姓)의 뒤를 이어 천자(天子)된 화덕왕(火德王)으로, 이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백성에게 나무를 깍아 쟁기를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 자루를 만들어서 농사(農事)짓는 법(농경:農耕)을 가르쳤고, 매년 12월에 여러 가지 동식물(動植物)을 모아 하나님께 바치고 농경(農耕)의 보고(報告)를 드리는 사제(?祭)를 행하였으며,



붉은 채찍으로 나무를 쳐서 백가지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醫藥)을 만들었다. 또 한낮을 기해 물건을 가지고 모여 시장을 열어서 제각기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는 것도 가르쳤다.

염제(炎帝)는 B.C3164年(丁丑年)나라를 세워 처음에는 중국 동쪽 중부 곡창지대인 황하강(黃河江)과 양자강(楊子江, 중국발음:양쯔강)사이인 진(陳) ‘〔완구(宛邱):안휘성 회하(安徽省 淮河, 중국발음;안후이성 화이허강)상류접경지역인 하남성 문(河南省 吻, 중국발음;허난성 원)지방(地方)〕’에 도읍(都邑)하였는데, 후에 중국 동북부 황하(黃河)가 흐르고 있는 산동성 곡부

(山東省 曲阜, 중국발음;산뚱성 취프)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그후 염제

(炎帝)는 신농씨제(神農氏齊) 건국(建國)의 기틀을 완전히 다지고 B.C3024년에 붕어(崩御)하시었다.



이후 강성천자(姜姓天子)가 아래와같이 8代 520년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계대(系代)와 재위기간(在位期間)을 살펴보면 다음과같다.

①염제(炎帝):정축년(丁丑年, B.C3164年)즉위, 재위140년간

②제승(帝承):정유년(丁酉年, B.C3024年)즉위, 재위 60년간

③제림(帝臨):정유년(丁酉年, B.C2964年)즉위, 재위 80년간

④제측(帝則):정사년(丁巳年, B.C2884年)즉위, 재위 48년간

⑤제백(帝百):을사년(乙巳年, B.C2836年)즉위, 재위 46년간

⑥제래(帝來):신묘년(辛卯年, B.C2790年)즉위, 재위 48년간

⑦제양(帝襄):기묘년(己卯年, B.C2742年)즉위, 재위 43년간

⑧제유(帝楡):임술년(壬戌年, B.C2699年)즉위, 재위 55년간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염제즉위를 계유년(癸酉年:B.C3168年)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주강씨세보(晋州姜氏世譜:서기 1909年 己酉)에서는 정축년(丁丑年:B.C3164年)으로 기록하고 있다.』


염제신농씨제(炎帝神農氏齊)는 이와같이 8代 520년간 (B.C3164~B.C2644년) 중국을 통치하여오다가 자손(子孫)의 덕(德)이 차차 쇠퇴해져서 제후(諸侯)들이 서로 침략하고 공격하게되므로 황제헌원〔黃帝軒轅:姓은 공손(公孫), 이름은 희(姬)〕氏가 창과 방패(干戈)를 쓰는 방법을 익히어 조공하지 않은 제후를 정복하여 모든 제후가 복종하게 되니 토덕왕(土德王) 황제 헌원씨의 천자(天子) 즉위로 염제 신농씨제는 B.C2644년 멸망당하였다.


어비통감 집람(御批通鑑輯監) 1권사장(一券四章) 이면(裏面)에 보면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가 B.C3024年(丁酉年) 재위(在位) 140年만에 붕어(崩御)하시자 그 능묘(陵墓)는「제붕(帝崩), 우장사(于長沙){금호남성 장사부(今湖南省 長沙府):중국남부의 지역인 중국발음으로 “후난성창사”}을다향[乙茶鄕:금장사부 다능촌(今長沙府 茶陵村)]장다능(葬茶陵)[염제능 재금 호남성 형주부 영성현서(炎帝陵 在今 湖南省 衡州府 靈城縣西)]」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염제가 청국시대(淸國時代)의 지명으로 호남성 장사부의 다능주에서 붕어하시니 국장(國葬)으로 그 시대의 다능땅(호남성 형주부 영성현 서쪽)에 능(陵)을 모시었는데 지금도 신농능(神農陵)이라하여 전하여 내려온다는 것이다.


청(淸)나라 세종 옹정(世宗 雍正) 십일년[十一年:우리나라 이조(李朝) 第21代 영조(英祖) 9년(九年) 계축(癸丑) 西紀 1733年]에 국가에서 인력(人力)을 동원하고 국비〈國費:양곡(糧穀)〉을 지급하여 그 능(陵)의 기지를 확장정리하고 그 능(陵)앞에 능묘사당(陵墓祠堂)을 건축조성하고 매년(每年) 음력(陰曆) 4月26日에는 신농황제만세 오곡선제천추(神農黃帝萬歲 五穀先帝 千秋) 제사일(祭祀日)로 정하고 봉사하여 내려온다고 하여, 진주강씨중앙종보(晋州姜氏 中央宗普) 第43號에는 그 능(陵)의 모형도와 사진 그리고 그 능묘(陵廟)를 선색궁(先嗇宮)이라는 것과 묘궁(墓宮)에 게시된 「치본어농(治本於農)」「만세농조(萬歲農祖)」라는 상하 현판사진도 게재 보도된 바 있다.



또한 진주강씨(晋州姜氏) 중앙종보(中央宗普) 第186號(‘92. 4. 15) 1面에 의하면 묘궁(墓宮)앞에「염제신농씨지묘(炎帝神農氏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묘비 전경 사진과 함께 게재 보도된 바 있다.


참고문헌(參考文獻)

①曾先之.「十八史略」.장충식譯.서울:사단법인 한국자유교양추진회, 1969.

※「十八史略」은 中國 宋나라(A.D960年~A.D1279年)말 元나라(A.D1206年 ~A.D1367年)초의 歷史學者「曾先之」가 저술한 中國의 正史「二十四史」 중에서「司馬遷의 史記」에서「托克托의 宋史」까지 약 四千年동안의 18가지 正史를 요약해서 알기 쉽게 編年體로 엮은 책이다.

元나라는 西紀 1206年 몽고의 成吉思汗(징기스칸)이 건국한 국가이다.


②晋州姜氏 世譜編纂委員會.「晋州姜氏 世譜」.著者 刊行, 1909.

③고동영.「檀君朝鮮 47代」.서울:한뿌리,1986.

※「檀君朝鮮 47代」는 檀奇古史.桓檀古記.揆園史話등 역사책을 참고하여 가능한 한 原文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桓仁7代 3,301年間(B.C 7199 ~B.C 3,899). 桓雄18代 1565年間(B.C3898~B.C2334). 檀君朝鮮 47代 2096年間(B.C2333~B.C238)의 歷史를 年代順으로 엮은 우리나라의 上古史이다.

④大野勃.「檀奇古史」.著者刊行,渤海國 天統31年(西紀729年).

⑤桂延壽.「桓檀古記」.著者刊行,韓日合倂 이듬해인 辛亥年(西紀1911年).

⑥北 崖.「揆園史話」.著者刊行,朝鮮第19代 肅宗1年.乙卯年(西紀1675年).

⑦晋州姜氏 中央宗譜 第136號 (“잃어버린 조상의 뿌리를 찾아서”편:

西紀 1988年 2月 28日 刊行)

⑧晋州姜氏 中央宗譜 第43號, 44號, 45號, 46號, 47號, 및 第142號

(西紀 1988年 8月 30日) 姜氏淵源編

※최근 서울 용산 종회장이며 주식회사 태평양화학 사장이신 姜元明 현종이 자유중국 대만 台北市에 가서 대북시 姜氏宗會 창립 10주년 경축식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입수한 강씨회신에 등재된 것을 羽林 姜相遠이 編纂한 자료임.



⑨晋州姜氏 中央宗譜 第186號(1992年 4月 15日) 第1面「姜姓의 由來와 歷史」

⑩御批通鑑輯監:중국 淸나라 高宗의 乾隆32年. 우리나라 李朝 第21代 英祖 43年 丁亥年. 서기 1767년 칙명에 의하여 四庫 全書를 편찬할 때에 학자 61명이 협력 편집하여 그 다음해인 乾隆33年. 西紀 1768年 正月에 출판한 중국 상고시대부터 明나라 말기까지의 역사서이다.

⑪이찬外 7人.「중학교 사회과부도 P40」.서울:주식회사 교학사,1986.

⑫이병설外 5人.「인문계고등학교 사회과부도P55~56」.서울:동아출판사.

1979.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사당(祠堂)은 호북성 수주시 수주현(湖北省 隨州市 隨洲縣)에 있으며 사당 내(祠堂內)는 염제신농(炎帝神農) 석상(石像)을 모셨으며 공원(公園)에는 거대한 석상(石像)을 세워 자랑스런 강성(姜姓)의 위상(位相)을 만천하(滿天下)에 빛을 발(發)하고 있으며 중국(中國)의 화조(華祖)로도 추앙(推仰)을 받고 있습니다.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릉(陵)은 중국(中國) 섬서성 보계(陝西省 寶鷄)란 곳에 있으며 염제신농(炎帝神農) 후손(後孫) 팔세손(八世孫) 유망(楡罔)의 피왕지(避王地)이며 서거(逝去)한 곳이 요녕성 금주시 의현현(遼寧省 錦州市 義縣縣)으로 지금 그곳의 유물(遺物)은 깊은 산속 절벽(絶壁)위에 거북좌대(龜座臺)가 보존(保存)되어 있습니다.

염제신농(炎帝神農)의 후손(後孫) 중에 특출(特出)한 후손(後孫)은 강태공망(姜太公望)으로서 성(姓)은 강씨(姜氏)요 이름은 여상(呂尙)으로 호(號)는 비웅(匕雄)이요, 태공망(太公望)의 선조(先祖)님은 우임금을 도와 물과 땅을 정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여라는 땅에서 책봉(冊封)되었기 때문에 봉지를 성으로 쌓아 여상(呂尙)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기원전(紀元前)에 1211年 은나라 경정 8年 을유년(乙酉年에) 출생(出生)하여 주(周)나라 문왕을 도와 주왕을 토벌(討伐)하여 상나라를 멸망(滅亡)시킨 공로(功勞)를 세웠다.


기원전 11세기에 제(齊) 지역(地域)에 책봉(冊封)되어 제나라의 건국시조(建國始祖)가 되신 분이다. 강성(姜姓)의 우상이요 자랑스런 선조(先祖)님이시며 조어대(釣魚臺)에서 세월을 낚은 유명한 선조(先祖)님이십니다.


태공망(太公望)은 주(周)나라 문왕 무왕 성왕 강왕 등 4대의 스승이며 아들이 13명이고 딸 읍강은 주무왕의 왕비(王妃) 왕후(王后)이다. 한국(韓國)의 진주강씨중앙종회(晉州姜氏中央宗會)는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수주 사당(祠堂) 및 공원(公園) 보계(寶鷄) 신농(神農)의 릉(陵) 참배(參拜)를 하였으며 태공망(太公望)의 고향 휘현(輝縣)과 치박시(淄博市) 사당(祠堂) 참배(參拜)를 열심히 매년(每年) 하고 있습니다.

천손 대제국 고구려 구국명장 강이식대모달 영정


태공망(太公望)과 시조님(始祖任)은 원손(遠孫)으로 생각하며 제나라 건국(建國) 후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전씨(田氏)한테 혁명(革命)을 당하여 후손(後孫)들이 동북아 동남아로 뿔뿔이 헤어졌으며 우리 시조님(始祖任)은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역임(歷任)하신 강자 이자식자(姜字以字式字) 장군(將軍)으로서 한국(韓國)의 자랑스런 동방의 거족이며 강씨 씨족(姜氏 氏族)의 시조(始祖)이십니다.


일본의 퇴마사인 음양사( 陰 陽 師)의 뿌리는 염제신농 때인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음양사를 연구하며 느낀 것은 일본 퇴마의 뿌리도 동이족의 시조인 염제신농 시기인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3000년 전인 강태공 때로 맞물려 짐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진리의 근원은 염제신농 환웅천제였다.

깨달음은 이미 하늘을 뚫었으나 발 끝이 이 어리석은 땅에 남아있음으로 천운(天運)을 행하기 어렵게 되었도다

수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하늘의 복을 스스로 막고 있는 형국임을 그 뉘가 있어 깨달았으려나!

통탄스런 땅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천 년 후를 내다보는 기운으로 인생을 접하고 있도다

한 순간의 이익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마다않는 어리석은 쥐새끼들은 수 억갑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리라..

필자의 인생엔 구원할 자들과 구원 불가치한 자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죽은 자 산 자들을 모조리 가려 진실을 밝혀내고 심판정화할 것이다.

필자는 가려내기 위해 이 땅에 왔노라..

심판은 나 이후에 올 인물이 필자의 남김을 따라 엄히 행하게 되리라..

p:s- 전쟁은 군대로만 치루어지지 않는다.. 전쟁이 나기 전 각 나라마다의 능력자들이 먼저 전쟁을 치루게 된다.. 속세인은 알 필요가 없으나 진리는 항시 숨쉬고 있다..그대들(구원할 가치가 있는 진정 선량한 자들) 곁에서....

뿔은 바로 하느님을 상징하며 바로 염제신농을 칭하는 언어다

신농(神農) 이후 제래(帝來) 때까지 나타난 글자로는 미(美)가 있다

이는 (羊大의 合字로서 큰 염소는 살림을 풍부하게 하니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어 군(君)과 군(群)이 나타났는데 <양들이 떼 지어 다니는 모양>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羊은 수놈이 主人이므로 양두(羊頭) 즉 압군(壓群)과 양(養)과 상(祥)

그리고 선(善)과 의(義) 등의 글자가 모두 羊에서 나왔다 <중국 상고사회신론> 

신농씨(神農氏)는 <|>를 표지로 삼았는데 이는 고마(神신) 즉 하나님으로서

세상에서 만물(萬物)을 효능(效能)에 따라 최초로 끄집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잡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문해자>



日本 神祠에 모셔진 염제신농

신농에서 웅족(熊族)이 그리고 양족(羊族)과 우등족(牛族)이 파생이되었고

모두 다 봉(鳳)과 웅(熊)을 신물로 삼았으며

그 직손들인 고구려 때에 이르러 서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 중황웅의 5방 신장으로

자리잡아 고구려를 수호하는 호국신(護國神)이 되었다.


고구려 천손,민[天孫,民]들의 조상 염제신농[炎帝神農] 

            천손[天孫] & 천민[天民]의 정의[正義]
한반도 민족구성
    
천손[天孫]이란 하늘의 직계자손을 의미하는 말이고  천민[天民]이란그 천손들이 다스리던 백성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구려만 따져도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부터 정통 고구려인들만 성씨를 가졌지 고구려 천손들이 다스리던 천민들은 성씨가 없었으며 또한 그 정통 천손고구려인들이 수족처럼 부리던 말갈족 [후일 여진]등은 당연히 성씨가 없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성씨들 중 거즘 대부분이 고려 때 창씨한 성씨들이고 노비 상놈출신들이 성씨를 사용한 것은 일제시대 이후 백년도 안된 세월이다.



주- 이성계의 전주이씨는 정통 고구려인들이 다스리던 여진계로 고려 때 이씨[李氏]로 창씨한 것이다.

이들이 현재는 자신들이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족보에 적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우스운 예기다.

이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통 고구려인들이 세운 고려를 배신하고 [고려말 고려의 핵심 귀족이었던 강씨세력들이 거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림]조선을 세운 것은 진주강문의 혈손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한반도 끝머리에 성씨가 토착화된 건 신농의 직계인 강족[姜族]을 위시한 그 분성성씨[分姓姓氏]천손들로 말미암은 문화 및 성씨계념이 퍼져나가 생긴 결과로 한반도 끝머리의 인간들은 아예 성씨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

이후 그 무리들이 김,박[金朴]이라는 성씨를 창씨하고 이[李],정[鄭]등의 동이웅족의 성씨를 베껴쓴 이후 성씨의 원 계념이 퇴되어진 이래 이 땅에선 발전이 아닌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후 고구려를 이루던 많은 민족들[크게 려黎=麗9族]이 수,당 및 그들의 꼭두각시로 쌀배달하던 신라범족들과 근 70년이 넘는 세월간 전쟁을 치루며 거즘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으나 마지막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70년 전쟁에 지친 결과로 성문을 열어주어 고구려의 그 웅장하고도 장대한 역사의 막이 내려졌다.



이후 고구려 민족들은 고구려복원을 꿈꾸며 한반도,중원,일본등으로 갈려져 나가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남아있던 고구려의 후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파는 후일 발해라는 중원보다 더 막강한 나라를 세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신라범족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세력을 과시했으나 거란에게 망하여 고려로 귀속한 세력이고 한파가 바로 태조왕건을 추대하여 직접 당과 신라를 무너트리고 고구려를 이어 고려[高麗]를 세운 우리 진주강문을 위시한 고구려,백제계의 귀족들 및 유민들이다. 



이 고구려를 이루던 성씨없던 고구려민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를 정복하고 현재의 일본을 세웠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성[姓]이 없다. 다만 씨[氏]를 성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자신들을 천민[天民]족이라 칭하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은 고구려계가 아닌 백제계이나 백제의 뿌리 또한 고구려계 천손웅족[天孫熊族]이다.

이렇듯 수많은 물적 인적 피해를 낳고 아시아 문명의 퇴보를 가져온 후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 백제의 천손 동이웅족[東夷熊族]들이었던 것이다. 허나 중원에게 뺐겨버린 광대한 고구려의 영토를 영영 되찾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신사에 모셔진 신농상-일본의 천민[天民]들은 신농을 자신들의 신[神]으로 모시고 있다.

                                             
일본[日本]!태양의 근본이 살아숨쉬는 나라라는 뜻이다.

즉은 자신들은 태양신의 백성들이란 말이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들의 조상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은 농업의 신이기 이전에 태양신이었다.

그래서 불을 상징하는 염제를 제칭[帝稱]한 것이다.

이 아시아 태양신이 서양정신의 신적 계념인 제우스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를 이룬 민족인 려 9족들은 고구려 망국 후 크게 3갈레로 흩어졌으며 이는 한국을 막론하여 중국,일본으로 갈려져 나간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신사에 신농을 모시고 있고 중국은 아예 자신들의 시조로 모시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예기일 것이다.

허나 한국이란 땅은 미미하여 신농의 후손들이 있는지도 모를정도인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엄밀히 따지면 일본은 타민족이 아니다.

언제까지 일본을 침략자 학살자들로 인식하며 증오를 되풀이할 것인가?

고인 물은 결국 썩듯! 그런 소인배적 사고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민족의 발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일본 중국을 넘어 아시아의 천손 천민의 후손들은 단합해야 한다. 더 이상의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서로가 피해를 볼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고구려,백제를 위시한 정통 천손족의 조상인 염제신농은 우리의 조상이지 중국의 조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린 이것을 1400년 간이나 잊고 혹은 알면서도 현재의 비리에 은거하여 때를 기다리며 인내한  것이다.


자신들의 조상을 모르는 후손들 치고 잘 되는 후손들이 없음은 망고의 진리이다.

지금이라도 진정한 천손의 근본인 강문[姜門]에서라도 우리의 원 조상인 염제와 치우 그리고 강태공을 찾아와 민족의 국조로 받들어야 한다. 그럼 잃어버린 아니 잠시 잊고있던 [1400년간] 민족정신이 되살아나 다시금 그 옛날 천하의 중심민족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리라..



언급하여 일본은 원 주민인 왜와 정복자 고구려,백제의 천손들이 함께 사는 나라이다.

한국은 남방계 신라범족과 북방계 정복자 천손 동이웅족[東夷熊族]이 공존하고 있는 나라이다.

고구려 백제계는 동이웅족[東夷熊族]이고 신라는 범족이다.

근본 뿌리가 다를진데 김부식을 필두로 한 중화사대사관 추종 신라종들 및 야사가들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가 정사로 둔갑하여 설쳐된 세월이 그 얼마인가?



그 세월에 민족은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타 나라의 화살받이 조공받이로 전락하여 대대손손 침략이나 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것은 지나온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무능한 임금을 위시로 한 조정의 간신들과 오리배들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이었으며 그 어리석은 희생물들이 바로 조선과 일본의 백성들이었을뿐이다.



여진계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나 일본의 지배자들이나 모두 그 민족들을 이용하여 죽음으로 내몬 독재자들이었을 뿐이다.

더 이상 독재자들의 이용물,소모품들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우린 우리고 그 자들은 그 자들일 뿐이다.

우리뿐만이 아닌 일본의 백성들도 이 점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그 어떠한 독재자들의 마수로부터도 현혹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

지나온 역사를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그 비참한 역사의 단죄를 피해갈 수 없음을 우린 알아야 한다.

필자는 우리 한민족이 고구려 망국 후 반복된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에 이런 글을 쓰는 지도 모를일이다.



역사는 역사이어야 한다. 왜곡된 졸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 및 만년간이나 이어온 선가[仙家]의 사서들을 모조리 불태우고도 정신 못차리고 남의 역사를 저희의 역사인양 왜곡해대는 비열한 신라종들의 괘씸함은 반드시 언제고 심판할 과제로 남아있음을 우린 주지해야한다.



자신들의 역사가 참으로 비참하니 어떻게해서든 남의 역사 특히 우리 웅족[熊族]의 역사를 저희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유일 것이나 위대한 역사는 그 역사를 만든 진짜 혈손들이라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가짜들이 아무리 진짜행세를 해봐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북에서 고구려 흉내내고 있는 비열한 김일성 및 김정일이 부자를 보라!

신라종들이 아무리 고구려흉내를 내봤자 결국은 저희 신라와 같은 타락하고 야비한 나라를 만들어 백성들만 피터지게 힘겨워해야 하는 것이다.



조상을 받들고 친족을 위하는 계념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풍속이다.

짐승들에게는 이런 관념조차 없다. 이런 숭조효친 사상과 미[美],양[羊],인[仁],의[義],예[禮]등은 짐승과 같은 인간들을 사람이 되도록 교화시키는 선조들의 아주 숭고한 가치관이었다.



허나 이 땅의 인간들은 특히 극렬 기독교도와 같은 외래종교 맹신자들은 이런 숭고한 계념을 우상숭배니하며 매도하고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상의 목을 치고 이스라엘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교회들 및 부정 부패가 난립하고...

이건 아니다.. 필자의 의식으론 저런 자들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조차 없다.

개,돼지가 오히려 더 값진 생명들임을 부인키어려울 정도이다.



교회 십자가를 믿는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인 사랑으로 만사를 대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닌 타종교나 핍박하고 저희 종교만 종교고 타 종교들은 이단이다라고 매도해대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부 이런 극렬적인 기독교도들이 이 나라 전체의 교인들을 진정한 예수의 이단으로 내모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조상을 받들고 예를 지키고 어짐으로 성품을 삼는 이런 고귀한 심성을 배우려하며 따라갈려고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시기 질투를 일삼아...

"너희 조상 그렇게 잘나서 좋겠다!"

"조상따위나 모시는 우상숭배하는 놈들은 이단이다"

이런 식의 모함 및 매도를 일삼는 비천한 자들이 넘쳐나는 땅이다. 그러니 결국 호주제도 폐지되고 성씨도 개판났다.



예수가 진정 자신들의 조상을 무시하고 폠훼하라는 말을 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저희 자신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고 있는 자들은 아닌지 자신들에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고귀한 인품을 따라 고귀한 사람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닌 비천한 자들의 비천한 행실을 믿고 따라가니 이 좁아터진 땅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없는 것이다.

비천하여 어리석음의 댓가는 반드시 피가 되어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 이 땅의 운명은 이미 눈에 선한 필자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필요치 않으리라..



필자와 같이 중도적 관점으로 진리를 탐구하여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이들은 굉장한 스트레스와 부단한 정신적 수양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진리탐구는 힘이 드는 것으로 솔직히 아무나 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도 하다.

타고난 정신력 및 두뇌가 아니고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부인키 어렵다.

이것으로 각략하기로 한다.  이 땅의 역사찾기는 너무나 비참하여 스트레스 그 자체이기에...



p:s 강씨성을 쓰는 자들 중 일부 몰지각하여 뿌리 근본관렴조차 없는 자들이 자신이 호랑이의 후손인줄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

저희 할아버지 아버지가 자신들의 근본 뿌리조차 말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히 말한다. 성강[姜]을 쓰는 진정한 동이천손[東夷天孫]의 후손들은 정통 웅족[熊族]이지 범족이 아니다.

정통 동이강족[東夷姜族]을 망신시키는 가짜들은 강씨성을 쓰지 말라. 근본도 모르는 자들은 필요없도다.



한국내에 중국성씨라고 알고 있는 성씨들의 뿌리를 캐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고구려를 이루었던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같이 공부한 이스라엘 친구들이 몇 명 있어 언젠가 한국에 와 보고는 하는 말이

"mr.kang의 나라는 참 이상해! 우리나라보다 십자가가 더 많으니.. 자네들의 조상은 없는가?"

필자가 생각해도 이상한 땅의 부끄러운 인간들! 심히 숙고해볼 문제일 것이다.


염제신농의 덕을 쇠하게 한 자들,,,

염제는 곧 신농(神農)을 의미한다.
신농은 배달국 고시씨(高矢禮)의 후손으로 
서방 강성의 득성조로 추앙받는 분이시다.

신농의 아버지는 배달국 치우벼슬로써 서방평정을 위해 천군을 통솔하고

서토로 파견되어 유웅국(有熊國)을 세운 소전(少典)이다.

소전의 장남으로써 저자를 열고 의학을 펴고

인류 최초로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킨 분이기도 하다.

현재 한의학의 시조로도 추앙받는 분이시다.

이 시절에 인세는 물물교환에서

화폐 통용으로 바뀌게 되는 과도기였다.

민초들의 삶을 쉽고 자유롭고 풍족하게 하여

보다 윤택한 삶의 질을 영위하게끔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화폐의 활용은 
유수와 같은 세월의 흐름과 이기적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해

그 원미가 변질이되어 오늘날 인간들이 자신의 육체는 물론

정신과 영혼까지 팔아대는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진정 신농의 도는 실패하였는가?


짐승들을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신농의 도는

그 때나 변함없이 사람보다는

짐승들이 많은 이 현실에서 진정 실패한 도인가?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한 짐승들이 많아졌음이니 ...
정녕 전쟁은 또 다시 올 수 밖에 없음인가!!



존재 가치가 없는 각종 빈모들로 인해 호주제가 페지된 작금!!

스스로들이 쌓은 죄업으로 이미 소멸의 극점에 와있도다.



지은이/ 破天荒 昊聖.

  

2002. 05. 11



                                  姜姓之正義

天은 뛰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형화한것으로 남자(男)을 나타내니 곧 개척을 의미하고

地는 지게를 진 사람의 모습을 상형화한것으로 여자(女)를 나타내니 곧 생산을 의미하며

人은 밭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형화한것으로 중도(中道)를 나타내며 곧 노동을 의미하니

이 세가지의 조화로 삼태극을 이루어 곧 농사를 나타내고 있음이다.,

 

성강(姜)은 이 천지인(天地人)사상과 왕중왕(王中王)의 의미인 제(帝)를 상징화한것으로

그 자체가 근본 뿌리,곧 한님의 뜻을 담고 있도다.



강(姜)은 양(羊)을 불(火)에 구워 먹는다는 의미로 양족(羊族)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지금으로부터 4500여년전 염제신농의 8세손 적제 유망이 황제헌원과의 3번에 걸친 큰 전쟁에서 패한 후

불(火) 대신 계집 여(女)자를 붙여 현재의 강(姜)으로 격하된것이다.



이런 연유를 모르고 무지한 일부 사학자들이 강을 풀이할 때

                              姜=羊+女

로 풀이하여 강성(姜姓)이 모계에서 비롯된것이라는 등 망발을 일삼게된 계기가 된것이다.



후일 치우 구려족과 연합하여 결국 헌원을 물리쳤지만 강(羊+炎)의 의미까진 바로 잡지 못하여

지금의 강(姜)으로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 온것이다.

 뿔은 하느님 바로 염제신농및 그 후손을 상징하고
王은 바로 인중지왕 인간 중의 으뜸을 의미하며
女는 족손을 많이 퍼트리라는 의미 즉 다산을 상징하여
바로 성강(姜)을 풀이하면 되리라

이 강(姜)의 음(音)은 북부여와 몽고,고구려에서는 칸(水+干)의 의미로 쓰였으며

서양으로 흘러들어가 킹(KING)으로 우두머리 ,으뜸을 나타내는 어원이 된것이다.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姜錫泰 絶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