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시민의 심법은 어디있나?
자유민족의 근간인 근본 뿌리
호주제부활
군가산점부활
여성가족부폐지
이 3가지는 진정한 자유민주시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기초과제이다.
고구려 강이식 병마도원수 고,수전쟁
高句麗 姜以式 兵馬都元帥 高,隋戰爭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선조들께서 쌓으신 어진 덕과 빛나는
공적[功積]의 결과임을 아무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멀리 고구려[高句麗] 시대 구국공신이신 병마도원수공 휘
이식장군[以式將軍]을 동방시조(東邦始祖)님으로 하여 1500여년에 걸쳐 빛나는
조상님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나와 오늘날 동방(東邦)의 대성(大姓)이 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그 지엽(枝葉)이 울창하고 수원(水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장구(長久)한 것은 대자연(大自然)의 원리(原理)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조상의 역사가 뚜렸하고 대대로 기반(基盤)이 확고(確固)한 성씨는
그 자손이 번성(繁盛)하고, 역대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를 주도해 나가고 있음은 지나간
역사가 이미 증명(證明)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강성(姜姓)은 인류창시(人類創始)와 더불어 득성(得姓)한 염제신농(炎帝神農=姜石年)
이래 반 만년(5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씨로서 동방시조 휘 이식장군 이후로
1500여년간을 계승하여 내려와 작간에 명공거경(名公鉅卿)이 무수히 배출되어 자연히
동방의 대성(大姓)으로서 인류사 가장 오래 된 성씨로 단일본 명문거족(單一本 名門巨族)이
되고 있음은 자타(自他)가 공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아! 장하도다.
성인(聖人)의 예법(禮法)을 지은 뜻이 어찌 우연할 것인가!
안으로는 수신과 제가에 힘쓰고 나아가 나라에까지 베풀어 세상에 모범이 되며
인심을 이끌고 종족을 화목케하고 구족(九族)을 친목케함이니
정치하는 데에도 없을 수가 없으리로다.
우리민족은 일찌기 백두산 흑룡강(黑龍江) 일만리 평야 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써 집단(集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대륙의 침략세력(侵略勢力)에 저항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한무제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끌고 나와 침략(侵略)했을 때 희생된 이가 그 얼마 였던지...
강토의 일부일 망정 저들에게 빼았겨 한사군의 설치(設置)를 보았던 것이나
400여년의 끈질긴 저항 끝에 끝내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야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적 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일찍이
공손씨(公孫氏) 혹은 위구(魏寇)와도 싸우면서 장열(壯列)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않이했으며,
마침내 수,당양조(隋,唐兩朝) 五帝 70년 동안 설인귀( 薛仁貴 )700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번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맥(血脈) 속에 전해 내려 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 유역을 무대로 하여 만주와 연해(沿海)의 서쪽으로
요하(遼河)유역까지 강역을 펴갔던 일대강국(一大强國)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가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 세력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域)에 까지
뻗어 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우리 고구려는 민족항쟁(民族抗爭)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문제(隋文帝)가 진(陳)을 병합하고 지나(支那)를
통일한지 17년이라...
수나라가 그간 연곡(年穀)이 자주 풍등(豊登)하고 갑병(甲兵)이 매우 풍족하니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다투자 하여 무망(誣罔)을 극하고 패만(沛慢)이 심한 매우 모욕적인 글을 보내어 왔다.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군신들의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강이식장군이 더는 지켜 볼 수 없어 사자후를 토하시길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게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함이 마땅하다]하시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하시니 열제가 이를 낙종(樂從)하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오만을 발하여 임유관(臨揄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병(穢兵) 일만으로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여 수병을 끌어내시어 걸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로써 수나라와의 기나 긴 전쟁 그 서막이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장군의 이름 석자도 보이질 않이하니 이는 김부식이 수서(隋書)만을
초록(抄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지만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장군을 임유관전쟁(臨渝關戰爭=서기 598년)의 병마원수라하고
대동운해(大東韻解)에는 강이식장군을 살수전쟁(薩水戰爭=서기612년)의 병마도원수라하였다.
백상루ㅡ 살수대첩을 치룬 곳
다음해인 영양열제 9년은 백제 성덕왕(聖德王)45년이며
수문제(隋文帝)18년(서기 598년)이다.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급습하여 수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장충(張忠)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하니 이에 자만한 수문제가 30만 대병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뜨게 하니 이는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나 실상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요서로 와서 양량군(陽諒軍)에게
군량(軍糧)을 보급하기 위함임을 눈치채신 강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영격(迎擊)하여
양선을 침몰시키고 군중(軍中)에 명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라하셨다.
그러니 수병은 식량이 없는데다가 수개월이 흐르메 기아와 질역(疾疫)으로 사망이 낭자하여
퇴군하게 되니 강장군이 바로 추격하여 수상(水上)에서 적을 거의 섬멸시키시고
무수한 군자기기(軍資器機)를 가지고 개선하시었다.
이 때에 수군 8~9할이 수장되었고 살아 돌아간 자는 이천 백여명에 불과 하였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를 징벌할 때 병마원수로써 수병을 임유관에서 대파하시고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 살수대첩 때에 병마도원수로써 을지문덕과 같이 수의
113만대군을 섬멸시키셨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선다.
사적이 조선상고사(신채호 저)와 국방정훈지 (이선근박사 저)에 기록 되어 있다.
봉산사(鳳山祠)를 진주(晋州)에 세웠으며 서기 1975년에 국가에서 봉산사를 성역화하여
영원히 추모한다.
강장군의 묘소는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있다.
봉산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비문을 전주후인 문학박사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아! 장하시도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英雄)이여!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리웠다 나타 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 30만을 쓸듯이 무찌르고
우리님 개선(凱旋) 하실 제 그 영광이 어떠하던고!
1300여년이 바람같이 지났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 속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의 전통 자손 만대에 이어가리라.
전주 후인 노산 이은상 찬.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업신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
<수(隋)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請)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그 구구(區區)한 반독립이나마 유지해온 것은,
고구려가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참고 저항하였던 점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망하였더라면
백제나 신라가 다수의 군현(君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古史)를 읽을 때에 신라와 백제가 수에 청원(請援)한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역사일 것이다.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후 통계공 후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단기 4339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錫泰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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