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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3일 금요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시민의 심법은 어디있나?
 자유민족의 근간인 근본 뿌리

호주제부활
군가산점부활
여성가족부폐지
이 3가지는 진정한 자유민주시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기초과제이다.










2020년 4월 1일 수요일

大高句麗帝國 兵馬都元帥 姜以式將軍 高&隋戰爭 勝戰史(고구려 강이식장군)



 *진주강씨(晋州姜氏)의 동방시조(始祖) 



필자의 동방시조 대고구려제국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고수전쟁사






고구려 강이식 병마도원수 고,수전쟁

高句麗 姜以式 兵馬都元帥 高,隋戰爭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선조들께서 쌓으신 어진 덕과 빛나는
공적[功積]의 결과임을 아무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멀리 고구려[高句麗] 시대 구국공신이신 병마도원수공 휘
이식장군[以式將軍]을 동방시조(東邦始祖)님으로 하여 1500여년에 걸쳐 빛나는
조상님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나와 오늘날 동방(東邦)의 대성(大姓)이 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그 지엽(枝葉)이 울창하고 수원(水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장구(長久)한 것은 대자연(大自然)의 원리(原理)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조상의 역사가 뚜렸하고 대대로 기반(基盤)이 확고(確固)한 성씨는
그 자손이 번성(繁盛)하고, 역대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를 주도해 나가고 있음은 지나간
역사가 이미 증명(證明)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강성(姜姓)은 인류창시(人類創始)와 더불어 득성(得姓)한 염제신농(炎帝神農=姜石年)
이래 반 만년(5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씨로서 동방시조 휘 이식장군 이후로
1500여년간을 계승하여 내려와 작간에 명공거경(名公鉅卿)이 무수히 배출되어 자연히
동방의 대성(大姓)으로서 인류사 가장 오래 된 성씨로 단일본 명문거족(單一本 名門巨族)이
되고 있음은 자타(自他)가 공언(共認)하는 사실(事實)이다.

아! 장하도다.
성인(聖人)의 예법(禮法)을 지은 뜻이 어찌 우연할 것인가!
안으로는 수신과 제가에 힘쓰고 나아가 나라에까지 베풀어 세상에 모범이 되며
인심을 이끌고 종족을 화목케하고 구족(九族)을 친목케함이니
정치하는 데에도 없을 수가 없으리로다.

우리민족은 일찌기 백두산 흑룡강(黑龍江) 일만리 평야 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써 집단(集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대륙의 침략세력(侵略勢力)에 저항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한무제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끌고 나와 침략(侵略)했을 때 희생된 이가 그 얼마 였던지...
강토의 일부일 망정 저들에게 빼았겨 한사군의 설치(設置)를 보았던 것이나
400여년의 끈질긴 저항 끝에 끝내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야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적 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저항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일찍이
공손씨(公孫氏) 혹은 위구(魏寇)와도 싸우면서 장열(壯列)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않이했으며,
마침내 수,당양조(隋,唐兩朝) 五帝 70년 동안 설인귀( 薛仁貴 )700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번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맥(血脈) 속에 전해 내려 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 유역을 무대로 하여 만주와 연해(沿海)의 서쪽으로
요하(遼河)유역까지 강역을 펴갔던 일대강국(一大强國)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가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 세력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域)에 까지
뻗어 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우리 고구려는 민족항쟁(民族抗爭)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문제(隋文帝)가 진(陳)을 병합하고 지나(支那)를
통일한지 17년이라...
수나라가 그간 연곡(年穀)이 자주 풍등(豊登)하고 갑병(甲兵)이 매우 풍족하니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다투자 하여 무망(誣罔)을 극하고 패만(沛慢)이 심한 매우 모욕적인 글을 보내어 왔다.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영양열제가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 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할 때
군신들의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강이식장군이 더는 지켜 볼 수 없어 사자후를 토하시길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게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함이 마땅하다]하시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하시니 열제가 이를 낙종(樂從)하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오만을 발하여 임유관(臨揄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병(穢兵) 일만으로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여 수병을 끌어내시어 걸안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로써 수나라와의 기나 긴 전쟁 그 서막이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장군의 이름 석자도 보이질 않이하니 이는 김부식이 수서(隋書)만을
초록(抄錄)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지만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장군을 임유관전쟁(臨關戰爭=서기 598년)의 병마원수라하고
대동운해(大東韻解)에는 강이식장군을 살수전쟁(薩水戰爭=서기612년)의 병마도원수라하였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 그리고 남한보(南漢譜).

백상루ㅡ 살수대첩을 치룬 곳

다음해인 영양열제 9년은 백제 성덕왕(聖德王)45년이며
수문제(隋文帝)18년(서기 598년)이다.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급습하여 수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장충(張忠)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하니 이에 자만한 수문제가 30만 대병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삼아 바다로 뜨게 하니 이는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나 실상은 양선(糧船)을 거느리고 요서로 와서 양량군(陽諒軍)에게
군량(軍糧)을 보급하기 위함임을 눈치채신 강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영격(迎擊)하여
양선을 침몰시키고 군중(軍中)에 명하여 벽루(壁壘)를 지키고 출전하지 말라하셨다.

그러니 수병은 식량이 없는데다가 수개월이 흐르메 기아와 질역(疾疫)으로 사망이 낭자하여
퇴군하게 되니 강장군이 바로 추격하여 수상(水上)에서 적을 거의 섬멸시키시고
무수한 군자기기(軍資器機)를 가지고 개선하시었다.
이 때에 수군 8~9할이 수장되었고 살아 돌아간 자는 이천 백여명에 불과 하였다.

고구려 영양왕 8년 서기 597년에 수를 징벌할 때 병마원수로써 수병을 임유관에서 대파하시고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 살수대첩 때에 병마도원수로써 을지문덕과 같이 수의
113만대군을 섬멸시키셨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선다.

사적이 조선상고사(신채호 저)와 국방정훈지 (이선근박사 저)에 기록 되어 있다.
봉산사(鳳山祠)를 진주(晋州)에 세웠으며 서기 1975년에 국가에서 봉산사를 성역화하여
영원히 추모한다.

강장군의 묘소는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있다.


            
봉산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비문을 전주후인 문학박사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아! 장하시도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英雄)이여!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리웠다 나타 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 30만을 쓸듯이 무찌르고
우리님 개선(凱旋) 하실 제 그 영광이 어떠하던고!
1300여년이 바람같이 지났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 속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의 전통 자손 만대에 이어가리라.
                                 
전주 후인 노산 이은상 찬.




강이식장군 姜以式 將軍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1)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많은 종족이 대립(對立)하였으나,
다 무무미개(貿無未開)한 유목(遊牧)의 만족(蠻族)들이라,
혹 일시(一時) 정치상의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그 붕괴(崩壞)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繼續)할 터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土着)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으로 만나면 서로 충돌이 많았다.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피차(彼此)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시기였다.

상고(上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건국이래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상태에 있어,

열국(列國)이 서로 침벌(侵伐)하므로 다른나라를 침범(외정:外征)할 힘이 없었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漢)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고, 태·차(太·次) 양 대왕때에는 고구려가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 거의 대등(對等)될 세력이 없으므로,

한을 쳐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隷),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가 되었고, 말기에는 왕위쟁탈의 난(亂)이 중첩(重疊)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僚東)으로서 공손도(公孫度)에게 항(降)하여

고구려가 가장 인민(人民)이 많이 모여살고 기름진 토지를 잃어

약국(弱國)이 되었으므로, 그 약국의 지위(地位)를 면(免)하려 하여

조조(曹操) 자손의 위(魏)나 모용씨(募容氏)의 연(燕)

- 곧 지나 북방나라를 향하여 도전(挑戰)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방(南方)에서 궐기(蹶起)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가졌었고,

고국양(古國壤), 소수림(小獸林), 광개삼대왕(廣開三大王)이 일어나 요동을 쳤고,

또 서북(西北)으로 거란(契丹)을 정복(征服)하고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간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인구가 번성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지나와 견줄만 하였다.
그러나 남방서국대(南方四國對)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생겨
후면(後面)의 견제를 받았으므로, 장수왕 이후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방통일에 전력하였다. 


고·수(高·隋)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업신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
<수(隋)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請)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그 구구(區區)한 반독립이나마 유지해온 것은,

고구려가 오랜 세월동안 굳건하게 참고 저항하였던 점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망하였더라면
백제나 신라가 다수의 군현(君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古史)를 읽을 때에 신라와 백제가 수에 청원(請援)한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역사일 것이다.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후 통계공 후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단기 4339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錫泰 삼가 기록하다.



원수공(元帥公) 강이식(姜以式)장군,
고구려 영양왕때 고구려 구국명장. 

대모달 즉 고구려 최고사령관으로 부장이자 제자인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건무(高建武=영류태제),연개소문(淵蓋蘇文),양만춘(梁萬春) 등이 이름을 떨쳤다


서기 597년(영양왕 8년) 수문제(隋文帝)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사신과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국서내용이



『요하(遼河)가 넓다고 한들 장강(長江)에 비할 것이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고 한들 진국(陳國)에 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루속히 신하로 칭하고 조공을 받쳐 섬기며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단 한사람의 장수만을 파견해도

모든 문제를 쉽게 끝낼 수 있다』

는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 있었다.
평원왕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태자인 영양왕이 등극하자마자
중신회의를 열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군신간의 의견이 여러 갈래였으나 강장군이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며 개전(開戰)할 것을 주장함에 영양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있는 만리장성의 입구인 임유관(臨楡關)으로 출전하여
첨예병 1만명으로 요서(遼西)를 공격하여 수군(隋軍)을 유인하며,
거란병 수천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했으며,

이듬해 다시 대병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징벌하고
수나라 요서 총관 장충(張忠)과 접전,
임유관으로 거짓퇴병(退兵)하자 수문제는 30만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을 나가게 하고
주라후(周羅候)로 하여금 평양(平壤)으로 진격하는 척하였으나

강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임을 미리 알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나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군(隋軍)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맺고 상품교역을 재개하였으나,
10수년이 지난 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 (영양왕 23) 고구려를 침공하자,
강장군이 수륙양군병마도원수(水陸兩軍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의 동생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군사만 113만이고 기타 노역병은 그 2배에 이르는 200만으로
총 300만이 넘는 적군이 침범한 것이었다.

300만에 이르는 군사를 데리고 수황제가 직접 침범한 
친정전투에서 첨 맞이하게 된 인물이 바로 
요동성주 겸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이시었다.
강이식장군이 거느린 요동성 군사는 10만이 고작이었다.

300만의 수군은 강이식장군이 지휘하는 요동성을 포위하여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수나라 총사령관 및 무수한 장군들이 강이식장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으며 무수한 사상자만 남기고 
함락 자체를 포기한다.


수황제는 결국 요동성공략 자체를 포기하고
별동대 30만을 뽑아 평양으로 곧장 진격케 하였다.

이에 수양제(隋煬帝)는 평양을 단숨에 공격하기 위하여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강장군은 을지문덕 장군을 시켜 거짓으로 패한 척하게 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까지 유인시키자,

적은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하다가 고구려군의 총공격에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백여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원수공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전(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서 있었는데
모택동 공산주의자들의 문화혁명 때 유실되었다.






개물교화(開物敎化)와 철인(哲人)-고구려 조의선인의 가르침
명철(明哲)한 사람!
즉 철인이 항상 마음을 비워 고요한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개율이다.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작금애 그 원 의미를 제대로 깨우친 인간은 지구상 5손가락에도 못미치는 수이다.
이는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도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철인은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며 태평하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때문에 철인은 뭇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안 되는 일이 없고
풀리지 않는 메듭이 없어서 항상 만사형통한다.

군대를 동원하는 근본이유는 타국이 침략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형벌을 주는 것은 죄를 없애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허(虛)를 자극하면 정(情)이 생기고 정을 자극하면 지혜가 가득해지고
지혜가 가득차면 덕이 융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비워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고여한 가운데 모든 것을 헤아리고,
지혜를 구사하여 온갖 일을 이치대로 처리하고,
덕으로 사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곧 신시(神市)의 개물교화이다.
하늘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法을 세우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식을 닦고 수련을 쌓아
교화(敎化)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을 이룬 이가 바로 철인(哲人)이다.,


 고구려 원수공 52세 후 박사공 27세후  통계공 21세손 眞風流士 剛龍 破天荒 昊聖 姜錫泰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