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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배달국 전쟁의 신 !! 치우천황 강자오지환웅(姜慈烏支桓雄=熊) 傳略

難得來此歡迎之至 苦肉之罪 淨土復歸  字無知己天孤只一人絶筆

어렵게 이 곳까지 온 것을 환영하노라.육신의 죄로 정토에 복귀하도다.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좁은 땅이라
천하에 독고(獨孤)했던 한 사람이 남기노라.

眞風流士 破天荒 昊聖 姜錫泰 봉화법전 晉州姜門 慶北 奉化法典破孫~!!!
 진주강씨의 조상!
중국 천수강씨의 조상!

https://blog.naver.com/pachunwangoo/50150714747
炎帝神農의 후손
한국 晉州姜氏들의 조상
炎黃戰-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전쟁
탁록대전-인류사 최대의 전쟁
蚩尤天皇!
姜慈烏支桓雄의 신물, 도깨비!
Fire God !

 전쟁의 신 치우 강자오지환웅[姜慈烏支桓雄]-일명 치우천황
 Travel 4 party which look for ancestor and leaves Emperor kang,jaoji hwanung of the war  

배달국은 동,서방을 포괄한 강씨(姜氏)들의 나라였다.

蚩尤天皇은 炎帝神農의 直系後이다. 神農의 8대손인 적제유망과는 형제간이며 중원대륙 전체를 유망이 다스리고 동방은 치우가 다스리고 있었다.허나 이 때에 서방 청룡방위의 공손계 후인 헌원이 유망의 사위로 들어오면서 대륙의 혼란은 시작된다.
치우는 고구려의 조상이고 강태공은 치우의 후손이므로 필자에겐 직조가 된다.

 _염제신농 정통동이족(東夷族) 계보 -

염제신농(8대 530년)- 신농국 제8대 제황 유망(중원전체를 다스림) 
                             _배달국 제14대 환웅 치우 강자오지(일본을 포괄한 동방전체를 다스림)
                             _유웅국 왕 황제 헌원(티벳을 포괄한 서방을 다스림)

-단웅국 초대제황 제괴(帝魁유망의 장자) -망제(罔단웅국 2대제왕) -성제(成帝 단웅국 3대제왕) -홍제(洪帝 환단고기에서 혁다세환웅으로 기록) - 태제(泰帝 환단고기에서 거불단 환웅천황(居弗檀, 48)으로 기록 일명 단웅(檀雄), 82세.홍제의 딸(姜女=熊女)과 혼인. 장자 단군왕검) 고조선 초대제왕 단제왕검 -북부여 해모수 - 대고구려제국 -고려 -조선 -대한민국

염제신농과 그 8대손 적제유망을 중국 및 한국의 사학자들이 구분치 못하여 유망을 신농으로 착각하여 올린 글들을 보면 부화가 치밀어오른다.
신농과 유망을 구별하자! 역사가 상당히 바뀔 수 있다.
신농의 8대손 제유망 때에 서방을 다스리던 헌원이 제유망의 사위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부터 대륙의 혼란이 잉태가 된 것이다.
아시아는 그 때까지 다시없을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헌원이 유망의 사위로 들어와 유망의 제위찬탈음모를 꾸미며 전쟁을 치루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배달국 게시판에 올리려고 하다가 단웅국 게시판에 올리는 이유는 치우로 인해 단웅국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치우의 본명은 강자오지이고 대륙 한족들에게는 제왕으로 혹은 삼황으로 불렸으며 동이족에겐 환웅으로 불리어졌을 뿐 같은 인물인 것이다.
제왕이나 환웅이나 같은 인물을 두 부류의 무리들이 나누어 부르며 서로 자신들의 조상인양 해대어도 결론은 단 한 사람이 그 자리의 주인공이란 사실은 잊지말아야 하리라..
신들의 전쟁 -탁록대전

삼황(三皇)은 동이족의 조상들로 문명을 창시했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또 우리의 직계조상입니다.

제목소전 서토개척기.
작성자: 파천황破天荒
작성일: 2003/10/16 [04:29]
전자우편: pachunwangook@hanmail.net
홈페이지: http://cafe.daum.net/pachunwangook

소전(小典) 서토 개척기..

지은이: 眞風流人  破天荒 昊聖.(진주강문 박사공 후 통계공 21대손후 
태백육은 도은공 강각(姜恪) 후손 강석태(姜錫泰) 지음

배달국 안부련 환웅(8대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때에 
소전(少典)이란 인물이 있었다.
안부련환웅의 아우이거나 아들이 아닐까 짐작한다.
사기(史記)에는 "웅족(熊族)출신으로써 고시씨의 방계이다"라고 적고 있다.

웅족은 천황비족(天皇比族)이다.
배달국은 18분의 웅족출신 환웅들이 다스렸으니 안부련환웅도 
웅족 출신으로써 재 8대 환웅자리에있었다.

그 시절 서토의 원주민(내쫓긴 호족(虎族 신라의 원형)과 한족의 시조인들)의 
어리석은 참상을 보다못하여 서토 파병을 결정하게 되고, 
그 시절 치우(蚩尤 가문)벼슬에 있던
소전에게 서토 평정의 임무를 맡기게 되는것이다.

이후 소전은 자신에게 속해있던 천군(天軍)을 이끌고 서토로 
출병을 하게된다.

그 시절 금수같이 떠돌던 지나인들을 하나 둘 평정해가며 산동에 이르러
비로서 유웅국(有熊國:곰이 있는 나라ㅡ 개국 기원전 3168년,)이란 
나라를 연다.

이후 서토의 교화를 위해 먼저 와있던 태호복희,여와족의 여인과 혼인을 하여
강공손(公孫)과 강석년(姜石年)을 낳는다.


공손은 차자로써 성격이 직선적이고, 굽힐줄을 모르며, 
한번 마음먹은 것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해내고야 마는 철심(鐵心)을 지닌 
고집불통이였다.

반면 석년은 장남으로서 모험과 호기심이 강하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백성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였다.

그런 판이한 차이로 인해 소전은 제2대 유웅국 황제의 자리를 석년에게로
넘겨주게 된다.

석년이 강수(姜水)에서 살아서 성(姓)이 강(姜)씨가 되고,
공손이 희수(嬉水)에서 살아서 성이 희(嬉)씨가 되었다라는 기록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불성설 무지한 소치의 기록이란 말이다.

글자가 만들어지기전 사람을 호칭하는 이름들이 먼저 나오는것이 당연할진데..
어찌 강(江)이나 산(山)명이 먼저 만들어 질 수 있단 말인가!

고로 배달국은 강씨(姜氏)의 나라였고,태우환웅천황때 먼저 중토로 파견나온
태호복희나 여와도 이미 강성(姜姓)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공손이 희씨로 성을 바꾼것처럼, 복희도 차후 풍씨로 성을 바꾸게 된다.

태호복희는 서토로 올 당시 배달국의 풍사(風師)직위에 있지않았나 싶다.
어떤기록에는 우사직위에 있었다라고 적고 있으나 오히려 우사(雨師)는 여와였고,
복희가 풍사의 벼슬에 있다가,서토로와서 (교화목적)그곳 원주민들에게
풍씨의 시조로써 추앙받게 된것이 아닌가 한다.

복희는 서토 하도의 개척자로 풍성(風姓)의 시조가 되었으며 후 8성의 시조가 된다.
8성(八姓)이란"패관임기포이사팽".이다.

허나 풍성은 15대에 가서 후사를 전하지 못하여 종이 끊기고 만다.
소전은 치우의 벼슬로써 이미 강성(姜姓)을 쓰고 있었으며,이름 소전은 호와 국명으로 쓰여지게 된다.

석년은 강씨성을 그대로 받아 유웅국을 물려 받았으며 공손은 헌원으로 진출하게 된다.
소전 제위108년간(서기전 3060년)에 드디어 강석년(염제신농)이 제2대
유웅국 황제로써 등극을 하게된다.

허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로 공손에게 제위를 넘겨주고,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같이
산동성 곡부에서 신농조선국이란 나라를 연다.

이 나라가 바로 신농의 (고)조선국이다...
이후 공손은 유웅국 제황이란 자리를 가지고,서토 원주민들과 그를 따르는 일부
천군들과 그 후예들로서 유웅국 제3대 제황에 등극을 했으며,
신농은 아버지 소전때의 그 모습 그대로 고조선을 열게 되는것이다.

그 뒤 공손의 후손이 헌원 언덕에 정착하여 성을 희(姬)로 바꾸고,호족(虎族)과 
한족(중원 원주민漢族)의 시조가 된다,연호는 헌원이다,

신농은 서토 강성(姜姓)의 득성조로 추앙받으며, 
웅족(熊族),양족(羊族)동이족의 시조가 되며,연호는 신농이다.
신농의 연호는 8대 530년을 이어 강석년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쓰니 
염제신농이라 칭한 것이다.
이로부터 서토 한족과 동방(웅,양족)동이족간의 피비린네나는 
역사가 잉태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절에 이미 근본 동이와 한족으로 갈리워지게 된것임을....

소전의 아들인 강공손의 성씨변천과정을 살펴보면 
姜->公孫 => 姬로 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농국(고조선)은 8대530여년 동안 이어졌으며,
공손은 희씨성으로써 두 민족은 대체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신농국 7대 제황인 제애때에 배달국 치우가문의 강씨(姜氏)여인과 
혼인을 맺어 제 8대 염제 유망을 낳는것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그때까지만하더라도 신농국(고조선)과 배달국간의 혼인이 
활발했던것으로보인다.
배달국 강씨여인의 아버지성씨는 당연히 姜氏가 되는 것이니 
배달국 자체가 이미 강씨국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후 8대 유망때 유웅국 황제(헌원)가 유망의 사위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대륙의 혼란이 잉태되게 되는것이다...


근본을 잊어버리고 근본 뿌리를 망각한 체 오직 야망만을 추구하는 헌원에게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오직 대륙 제1인자!!이 야망 뿐....


염황전[炎黃戰]과 탁록대전 그리고 웅녀[熊女]

신화는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구전되어져 결국 전설이 되어 남는다.

판천전투,탁록전쟁.

작성인/파천황 호성...

염제 신농(적제,축융),불의 신 ,농경의 신,의약의 신! 화폐의 신.차의 시조,
동방 한의학의 시조. 
炎으로 帝를 심았기에 炎帝라 불리워지고,
농사를 人世에 알렸기에 神農이라 불리워 졌다.

세계 모든 강족(姜族)의 근시조 이시다.

지금으로부터 5,222(2004년 기준)여년 전 약 5,200여년전 현 중국의 호북성 수현
역산에서 탄강하셨다.  
친부(親父)는  신시배달국의 치우란 벼슬을 지낸던 소전이란 분이며,
웅족(熊族) 출신으로 천족(환인)의 지배계층이였다.

서토평정 후 중토에 유웅국(有熊國 ㅡ 곰이 있는 나라)을 처음 세우시고

西土의 법도(法道)을 신시와 같게 하였다.

여등(女登)이란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시니 이 아들이 바로

후인들이 三皇이라 이름 지으며 칭송하는 신농(神農)이시다.

본 성명은 강석년(姜石年)이시니...

이분의 초상화는 현재 미국 화강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어나자 마자 이미 말을 깨우치고 걸어 다니셨다고 전한다.

(와전이 되었을 망정 그 만큼 영특 하셨단 기록이리라.)

태산이 있는 산동성 곡부는 신농이 2대 유웅국 제황으로써

처음으로 帝를 칭하며 조선(朝鮮=신농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곳이다.

신농은 강수에서 오래 머물면서 성(姓)을 강씨(姜氏)라고 하였다
라고

사기 및 기타 사서에는 전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신농의 이전부터 여와나 태호복희도 이미 강씨성을 사용했던게 아닌가 유추해 본다.


복희는 차후 風氏로 성을 바꾸어 8성으로 分姓 되었다.

그 후 15대에 종이 끊어 졌다하나

실은 원 성씨인 강씨성으로 복성한게 아닌가 한다.

15대까지 이어 온 성씨가 한번에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고로 강씨성은 배달환웅국의 성씨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다.

이로써 염제신농에 의한 인류 최초의 성씨(姓氏)가 탄생한 것이다.


신농이 羊族과 熊族의 제황이 되고 신농조선국은 8대530여년을 잇는다.

7대 제황인 제애때에 배달국 치우가문의 姜氏여인과 혼인하여

신농조선국 8대 제황인 염제 유망을 낳는다.


8대 제황인 염제 유망때에 이르러 황제헌원이

유망의 사위로 들어 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대륙의 혼란이 잉태가 된다.

결국 유망은 헌원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판천전쟁 염황전
판천의 벌판에서 벌어졌다하여 사가들은 판천전투라 칭하였다.

3번에 걸쳐 크나 큰 전쟁을 치루나 미리 야망을 품고 있던 헌원의 계략에
 결국 염제는 황제에게 패해 제황의 자리를 내어놓게 된다.

후 유망의 帝族들은 잔여병들을 이끌고 신시배달 치우와 힘을 합하여
헌원과의 대 결전을 준비한다.


이에 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신농의 후손 자오지가 들고 일어 나게 된다.

이때 자오지는 신시배달국의 치우(治尤)(군사를 담당하는 벼슬)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자오지가 들고 일어나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농계열 형제들 81인[ 강족(姜,羌族)]과
 9려의 겨레들이 같이 출병을 하게된다.


사서에서 말하는 구려(九黎)의 난이 이것이다.

후 탁록에서 십수년간 73회나 되는 대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치우가 한번 화를 내니 죽은 시체가 온 들판을 가득 매웠다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으니 이 전쟁이 얼마나 대규모의 전쟁이였는가를

가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전쟁이 바로 역사상 유레를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인

탁록전쟁이다.

황제에 속한 수 많은 기인 영웅들과

염제와 환웅국에 속해 있던 수 많은 의협,기인,영웅들과의 대 결전은

결국 십 수년을 끌었으며 둘 다 엄청난 손해를 남기며,

치우천황의 승리로 결말을 맺게 된다.


결국 헌원은 제황의 자리에 앉지조차 못하고 소호금천에게 권좌를 넘겨주나

소호금천도 7년만에 신농의 손자인 전욱고양에게 제위를 넘기고 만다

제위를 빼았긴 염제(유망)는 산으로 들어가 산사람이 되어 버린다.

신선(神仙)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파생하게 된다.


우리겨레를 신선족, 신선의 나라라 부르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니라.

치우천황은 염제국과 배달국을 통합한 후 동,서방 姜族을 일통(一通)했으며,

유망의 장자를 단웅국(檀熊國 =靑丘)의 임검에 자리에 앉게 한 후

일파가 그 여세를 몰아 장당(현 티벳)을 개척하여 800여간 다스리게 된다.

주- (티벳은 우리민족이 다스리던 피지배민족이지 우리 동이족과 한 혈통의 민족이 아니다.)

이 단웅국에서 후 단군조선의 장을 여는 단군왕검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신농때에는 이미 지배계층에서는 비단옷을 입었으며

갖가지 신무기와 농기구 등 수 많은 노예를 거느린 군주시대의 첫 장이였다.

전문적인 시장과 화폐의 통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던것이다.

이후 치우는 화백회의를 거쳐 제 14대 환웅이되었으며

원래 이름인 자오지를 따 자오지환웅으로도 불려졌다.


이후 치우의 아들들이 모두 강씨성(姜氏姓)으로 하여

천하를 다시금 안정되게 하여 이후 300년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의 장을 열었다.



치우천황의 뒤의 시대를 청구시대라 한다.

그 후 유웅국은 황제계와 신농계가 반갈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배달국과 염제국을 통합한 나라인 단웅국은

본 지배국으로써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제곡고신을 정점으로 신농계와

황제계의 본격적인 제위 다툼이 시작이 되었고

이때부터 신농계열인 이(夷)와 황제계열인 하(夏),

즉 동이족(東夷族)과 한족(漢族)으로 서서히 판가름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봄으로 해서
반성과 자각을 통해 현재와 그리고 미래를 보다 발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홍익의 정신을 심게 함이니라...


염황전이란 말 그대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와의 전투를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황제는 헌원을 말하고 염제는 염제신농이 아닌 그 8대손 적제 유망을 말함이다.
이 시기 유망의 사위로 헌원이 들어와 세력을 몰래 키우며 천하찬탈의 음모를 꾸미게
되어 발생한 전쟁이 염황전이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유망은 사위 헌원과의 3차례나 되는 전쟁에서 결국 패하게 되어 중토를 뺐기고 만다.

사위가 배신할 것이라곤 생각못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패한 전투로 유비무한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가 된것이다.

이에 참지 못한 강자오지환웅[姜慈烏支桓雄=치우천황]이 려[麗=黎한반도를 이룬 민족] 9족의 형제들을 끌어모아
헌원과 치루게 되는 전쟁이 탁록대전이다.

이 전쟁에서 치우천황은 헌원을 사로잡고 유망의 적자인 괴[魁]를 환웅국에 이은 단웅국[檀熊國=수도 청구]의 제[帝]에 추대하고 그 일파가 멀리 장당[티벳]까지 뻗어나가 그곳을 800년간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후일 중원사대주의 왜곡자들로 인해 치우천황이 황제에게 패한 것으로 오도된 것이다.
황제에게 패한 치우천황을 한민족은 물론이고 중원과 일본의 백성들이 전쟁의 신으로 받들리는 없는 것이다.

이 단웅국에서 단군왕검이 탄생하여 단군조선을 세우니 단군 고열가가 제위를 스스로 버리기 전까지 수 천년을 이었도다.

단웅국(檀熊國)은 名그대로 웅족[熊族]의 나라이다.
고로 환인 환웅 단군 모두가 웅족[熊族]이며 단군의 어머니가 바로 웅녀[熊女]이다.
이 웅녀의 아버지가 홍제[洪帝]이고 남편이 태제[太帝]이다.
이 홍제 태제는 모두 환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는 환웅[桓雄]들이다

환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는 환웅은 단웅국 제[帝]의 이름만 바꿔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이처럼 남의 조상을 분리시켜 자신들의 조상으로 변질시키려는 무리가 누구이겠는가!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로 만든 신라범족의 무리들인 것임이 명약관화한 것이다.

한술더떠 마고라는 것을 지어내어 우리 웅족의 환인 환웅 단군과 연계시켜 삼성조[三聖祖]가 마고라는 모계[母系]에서 비롯된 것인양 왜곡해대고 있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우린 경계해야 한다.

우리 천손족[天孫族]은 부계[父系]를 처음 만든 민족이고 내내 부계로 이어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역사(歷史)라고 하는 말은 부계 즉 문명의 시작을 일컫는 말이지 동굴에서 살때는 역사라는 말조차도 없었다..

                             단웅국[檀熊國]의 딸 단군의 어머니 웅녀[熊女=姜女]
                                                               
                                         제유망(帝楡罔) 이후 연대
시 대
帝/王名
내             용
제위연도 및 世/代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제유(帝楡)(유망(楡罔)
 *신농조선국(神農朝鮮國) 제 8세 제황.

호ㅡ염제(炎帝),연호:신농

헌원과의 3차례에 이르는 큰전쟁에서 패한 후 치우와 힘을 합하여 결국 헌원을 물리침.후 산으로 들어가 신선(神仙)으로 화함.
유망 제 1세때에 염라국(炎羅國)으로 불려짐.

죄를 지은 자들을 벌한다는 의미에서

염라대왕(炎羅大王)의 어원조가 되었다.


신물:황웅(黃熊=중방신장)



       사방신(四防神)

남:주작,북:현무,동:백호:서:청룡


ㅡ>주(柱)

      
제8대 BC 2766~2711

제위55년.
단웅국(檀熊國=靑丘國)

->
괴제(魁帝)
 *단웅국(檀熊國=靑丘國) 초대제왕.

유망의 장자


                      

치우 강자오지 (蚩尤 姜慈烏支)
자오지가 유망의 장자인 魁를 단웅국 帝의 자리에 앉힌 후 그 후예들이 장당을 개척하여 800여년간을 다스린다.

B.C2,707 즉위ㅡ장당(티벳)과 묘족(苗族)으로 갈림.-장당과 묘족은 치우의 후손들이 아니라 치우천황이 다스리던 백성들이다.(天民)
BC2711~
  망제(罔)
 *
 단웅국2대 제황.
단웅국(檀熊國=靑丘國)
  성제(成)
 *
단웅국3대 제황
 홍제(洪帝).
 * 한단고기에서 배달국 혁다세환웅으로 기록한 분이다.

단웅국  4대 제황
BC2452
  태제(泰帝).
 * 거불단 환웅천황(居弗檀, 48), 일명 단웅(檀雄), 82세.홍제의 딸(熊女)과 혼인. 장자 단군왕검. 

단웅국  5대 제황


B.C.2380 ~
단제조선(檀帝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단제(檀帝)

왕검(王儉)조선.

신묘(BC2370)년 5월.
 *단웅국 마지막 왕으로 요(堯)의 난을 피하여 동으로 이주하여 단제 조선을 세움.

후 삼한(三韓)
一.번한-蚩頭男-치우가문의 우두머리
二.진한-직접통치
三.마한 웅백다(熊百多=웅족백명)

四.탐라(제주)
  
터키.몽골(靑狼=푸른늑대) 

후 삼조선(三朝鮮)
 이 시절 범족(신라의 원주민)들이 단군에 의해 한반도 끝땅으로 내쫓겨 가게 된다.

2333~BC2240 제위93년.
강규(姜逵)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나뉜다.
 *강규(姜逵 ㅡ 현 동국(東國)강씨의 도시조(都始祖).
아버지를 모시고 동국으로 와 풍속을 중국과 같이 만듬) ㅡ 신농계 은나라 제족. 강태공에게 멸망 후 기자와 함께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운다. 

기자(箕子)ㅡ(名서여(胥餘)).
분파성씨 ㅡ 한씨(韓氏),선우씨(鮮于氏).

단군 색불루때에 번한을 넘겨받아 번조선을 맡아 다스림.
후 기자조선으로 불림.
번한국 30대 임검이자 번조선국 초대임검.


기자(箕子)조선.(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족속은 신라계가 유일하다,기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함은 현 대한의 奇,箕,鮮于,韓氏를 부정하는것과 같다.)




북부여北夫餘) 





*국민의 어리석음에 통탄하여
단군이 스스로 제위를 버린 후 단군의 일파인 웅족(熊族)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출사하여 북부여 단군 자리에 들어선다.















 삼국(三國) 


 *고구려(高句麗),백제(百齊),탐라(제주).



고려(高麗)
 * 王氏國(高句麗系).

   조선(朝鮮)


 * 李氏國(전주이씨ㅡ여진系)



염황치(염炎帝,황皇帝,치蚩尤).

중국이 자기네들 조상이라고 받들며 동상을 건립하여 매년 크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중국이 이럴동안 이 나라 인간들은 뭘 했는가!
황제는 그렇다손 치도라도 염제도 내 줘 버리고 이젠 치우까지 내줘 버리니
이 나라 사학계는 쓸모없는 쓰레기들만 끼 들어차 있더란 말인가!!


*탁록대전 *
우리나라의 역사는 BC 2333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운 날 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교과서도 그렇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단군왕검 위에 환인천제(桓因天帝)와 환웅천왕(桓雄天皇)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지만 환인천제나 환웅천황에 대한 기록도 없고, 환인이니 환웅이니 단군왕검이 고유명사인줄 알고, 단군상을 만들기도 하고 북한에는 단군능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인이나 환웅이나 단군은 국가원수를 일컷는 대명사였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신라 초기에 국가원수를 이사금이니 차차웅으로 부르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환단고기(桓檀古記)라든가 중국의 사기(史記)나 죽서기년(竹書紀年) 기타 사료를 보면 환인천제나 황웅천황에 대하여 한 줄의 기록만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가는 BC 7197년 제1대 환인천제가 천해(바이칼호)에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12연방으로 이루어진 환국(桓國)을 건국하고, 그 후 3300년 동안 수 십 명의 환인이 나라를 다스렸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분은 제1대 환인을 비릇하여 일곱 명의 환인(혁서, 고시리, 주우양, 석제임, 구을리, 지위리)뿐이다.

그 후 BC 3898년에 환국의 마지막 환인천제인 지워리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고 신시를 열고 배달국(倍達國)을 건국되어 거발한환웅천황이 즉위한 후 열여덟 명(거불리, 우야고, 모사라, 태위의, 다의발, 거련, 안부련, 양운, 갈고, 거야발, 주무신, 사와라, 자오지, 치액특, 축다래, 혁다시, 거불단)의 환웅이 1500년 이상 다스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환국과 신시 배달국이 오천년 정도 이어진 후, 마침내 단군조선이 탄생하여,
마흔 일곱 명의 단군이 통치한 것이다.

배달국의 환웅천황은 세습제가 아니었고, 몇몇 유력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환웅천황을 배출했는데 이 분들 중 배달국의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을 치우천황(蚩尤天皇)이라고 하는데 이 분은 BC 2707년 환웅천황에 즉위하신 후 109년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와서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갔으나.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철로써 활, 창, 갑옷, 투구 등을 만들어 무장시키는 등 최초로 철제무기를 사용하고, 머리에 철두갑을 만들어 쓰시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는 별명이 붙었었고, 이와 같이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이때부터 치우천황을 동방무신(武神)의 시조가 되어 수 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 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또 기록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큰 활(大弓)을 메고 다녀 이 때 부터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 외에도 <제왕연대>, <규원사화> 등 우리 역사서에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지리지>, <상서>, <운급헌원기> 등에도 실려 있다.

사기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구리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리는 구이(九夷) 즉 한국을 뜻하고 죽서기년에 의하면 염제 신농국 마지막 임금 유망(楡罔)에 이르러 같은 성(姓)을 가진 구리임금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어 치우천황이 곧 강(姜)씨임을 고증하고 있으니 이 분이 우리 강씨의 조상이 되시는 분이시다.


판천전투(阪泉)과 탁록(涿鹿)전쟁

진나라의 <천문지>는 '치우기는 고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 씨족략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함이 먼 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옛날 여상도 역시 치우의 후손이기 때문에 역시 성은 강이다. 대개 치우천왕이 강수에 살면서 얻은 자식들은 모두 강씨라 하였다.

晉天文志 蚩尤旗 類慧而後曲象旗 所見之方下有兵云 則乃蚩尤天王 上爲列宿也 通志氏族略 蚩氏蚩尤之後 或曰蒼 與高辛 亦盖蚩尤氏之苗裔 生大棘城 而轉徙於山 東淮北者也 盖蚩尤天王之英風雄烈播傳遠域之深 推此可知也…昔呂尙 亦蚩尤氏之後 故亦姓姜 盖蚩尤 居姜水而有子者 皆爲姜氏也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옛날 呂尙(여상 강태공)도 역시 치우의 후손이며 강씨이며. 치우는 姜水(강수)에서 살았다.

참고로 염제 신농씨 외에 三聖紀(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에 蚩尤天王(치우천왕)이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이분 역시 姜氏 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고서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한국, 중국을 포함한 동방의 軍神(군신)이었다. 왕호를 慈烏支天王(자오지천왕) 桓雄(한웅)으로 불려지며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고 스스로 머리와 이마에 구리와 쇠로 무장하여 천하가 이를 두려워하며 크게 떠받들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 있는데 그 높이가 7자이다. 우리 나라에도 여러 곳에 치우사당이 있다.  

사마천의 「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 

신농씨(神農氏)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 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軒轅)이 무력으로 제후를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원문) 神農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亭 諸侯咸來賓從 



그러나 치우(蚩尤)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 神農)는 제후들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였으나 이 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돌아갔다. 

(원문)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판천(阪泉) 들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涿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원문)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軒轅爲天子 代神農氏 




그러나 우리측 기록은 이와 전혀 다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다르게 쓰고 있다. 



▶ 공상(空桑)전쟁 

(시대적 배경) 복희(伏犧)가 다스리던 나라가 그의 여동생 여와(女媧)가 다스리다가 소전(小典)의 아들 신농(神農)가 다스려 왔는데 유망(楡罔: 신농의 6세손)에 이르러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흩어지는 등 혼란하였다. 이 때 서쪽에 있던 동이겨레의 헌원(軒轅: 黃帝)이 서쪽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치우의 전쟁준비) 치우도 유망을 토벌하여 서쪽 땅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치우는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여 하늘을 받들며 삶을 알게 하고, 땅을 일궈 사는 법을 알게 하는 등 내치부터 튼튼히 하여 병사를 양성하여 용맹스럽게 키우고, 밖으로는 정세의 변화를 살피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군사를 출정시키기에 이르렀다. 



치우는 형제 친척 중에서 81인 뽑아 장수를 삼아 군사를 나누어 지휘하게 하고, 이들을 데리고 갈로산(葛盧山: 지금의 葛石山 부근)에 들어가 광석을 캐어 청동으로 칼, 투구, 창, 그리고 화살촉을 만들었다. 

(탁록 전투) 치우의 군대는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고 일제히 탁록부터 공격하여 승리하니 그 기세가 질풍과 같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평정하였다. 

(공상 전투) 치우의 군대는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들어가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아홉 개의 야금소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예과(芮戈:예리한 병기)와 옹호극(雍狐戟:창)을 만들어 무장을 강화하고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치우는 군대를 이끌고 유망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양수(洋水)를 거쳐 유망이 도읍하고 있는 공상(空桑: 현 중국 하남성 陳留)으로 물밀 듯 쳐들어갔다. 이 때 유망은 소호(小昊)를 시켜 항전하였으나 치우는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크게 싸워 이기니 소호는 항복하고, 유망은 도망하였다. 



이 해에 치우는 열 두 제후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병하였다. 이 때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으며 서토(西土)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 탁록(涿鹿)전쟁 

공상전투에서 승리한 치우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가 태평하게 하기를 맹세하고 다시 군사를 진격 시켜 탁록으로 향하였다. 이 때 헌원(軒轅)은 치우가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천자(天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탁록에서)크게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려 하였다. 



치우는 공상전투에서 항복한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헌원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이에 치우는 친히 전쟁에 나서기로 하고 구군(九軍)에 동원령을 내렸다. 구군 중 8군은 2군씩 나누어 4방향으로 포위, 진격하게 하고 천왕은 나머지 1군(보병과 기병 3천)을 직접 거느리고 헌원의 진 중앙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치우 군대는 헌원을 향하여 사방에서 조여 들어 갔으나 굴복하지 않자 크게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적군은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치니 백리 사이에 병마를 볼 수 없었다.이렇게 하여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대(淮岱)의 땅이 모두 평정되어 탁록에는 성을 쌓고, 회대에는 집을 짓자 헌원의 족속들이 모두 신하라 하며 공물을 바쳤다. 



치우가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패하고도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치우를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백번이고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가 불같이 노하여 장수들에게 크게 싸워 위력을 보이도록 하였다. 치우의 군사는 헌원이 다시는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 판 큰 싸움을 벌려 한 개의 진을 완전히 초토화 하였다. 이 때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무기로 진을 이루고 진격하니 헌원의 군대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 후에야 싸움이 그쳤다. 



전쟁에 패한 헌원은 치우를 뵈러 가는 길에 당시 명성이 높았던 자부선인(紫府仙人)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는 치우의 영걸스럽고 불가사의한 전법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였다. 



자부선인은 헌원에게 「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주면서 공연히 싸움을 좋아하지 말고 마음을 고쳐 먹으라 고 가르쳤다. 



삼황내문경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동이겨레의 심신수련(心身修鍊)으로 치신득도(治 

身得道)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이겨레 고유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경전이었다. 



헌원은 이를 자부선인으로부터 배우고 익혀서 서토(西土) 사람들에게 전하였는데 이것이 동이 문명이 처음으로 서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계기인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태평어람(太平御覽)」,「노사(路史)」의 치우전(蚩尤傳), 「술이기(述異記)」, 「서경(書經)」의 여형편(呂刑篇), 「통전(通典)」의 악전(樂典) 등을 참조하여 엮었다는 「중국고대신화」는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탁록전쟁 전투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소설화 하여 설명하고 있다. 



황제시대에 일대 변란이 일어났으니 바로 황제와 치우와의 전쟁이다. 치우는 본래 염제(炎帝)의 후예로 염제와 황제가 탁록 벌판에서 전쟁을 벌릴 때 염제와 함께 참여하였다. 염제는 그 전쟁에서 패하여 남방으로 쫓겨났고, 치우는 포로가 되어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황제는 천하의 모든 신들을 태산(泰山: 산동에 있음)에 불러 모았다. 그 때 황제는 코끼리가 끄는 수례(寶車) 위에 앉고, 외 다리 필방조(畢方鳥)가 황제의 시중을 들고, 여섯 마리 교룡(蛟龍)이 수레 양측을 호위하고, 봉황(鳳凰)이 춤을 추고, 날개 달린 등사(騰蛇)가 땅에 엎드리고, 천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가 황제가 탄 수레가 지나갈 길을 청소하듯 가랑비를 뿌리고, 각양각색의 신들이 황제가 탄 수레 뒤에 행렬을 이루며 따르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더욱 볼만한 것은 이번 전쟁에서 포로가 된 치우를 대오의 맨 앞에 내세워 길을 뚫게 한 것이었다. 



염제의 후예인 치우는 본디 남방 거인 부족의 수령으로 그의 형제는 모두 81인이나 되는 데 모두 하나같이 키가 여러 장(丈)이 되고, 불사신처럼 용맹스러웠다. 또 그들의 머리에는 두 개의 견고한 뿔이 나 있으며, 귀 밑 털은 마차 칼 날처럼 빳빳이 서 있고 눈이 네 개나 되며, 손이 여섯 개나 되고, 발은 마치 소의 발처럼 생겼다. 치우의 형제들은 생김새가 괴이할 뿐만 아니라 모래와 쇳덩이, 바위 등을 먹었다. 



또 그들은 무기를 제조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예리한 창(矛), 날카로운 미늘창(戟), 거대한 도끼(斧), 견고한 방패(盾), 날렵한 활과 화살 등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그들은 초인적인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태산 서쪽에 천하의 모든 신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가 된 치우로 하여금 길을 내게 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지만 실패를 모르는 불굴의 치우는 마음 속 깊이 수치스러움과 심한 모욕감을 느껴 몹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혹시 치우가 자기를 배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풍백과 우사에게 치우의 행동을 감시하라 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치우를 따라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셋은 진정 마음을 터 놓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풍백과 우사의 도움으로 치우는 탈출구를 찾아 내서 쏜 살같이 남방으로 도망쳤다. 



치우가 남방으로 도망쳐 염제를 만나 황제의 힘이 별 것 아니므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쳐서 복수를 하자고 부추겼으나 염제는 노쇠하여 그냥 남방의 천제로 남아 있기를 바랬다. 



치우는 염제의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직접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7, 80명으로 형제들을 동원하였다. 치우는 남방 묘민(苗民)을 동원 하였다. 묘민은 본시 황제의 족속이었으나 황제가 자기들을 업신여기고 차별대우 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무너뜨리려는 치우의 계획을 찬동하였다. 



이 외에 남방의 산림과 소택지에 사는 괴물과 잡귀, 황제의 가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인간세계에 횡행하는 온갖 귀신을 다스리는 신도(神茶)와 울루(鬱壘)도 치우가 황제를 치는 대열에 가담하였다. 



치우는 염제의 명호를 빌어 ‘염제(炎帝)’라 칭하고 대군을 거느리고 남방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황제는 곤륜산 궁원(宮園)에서 치우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황제는 처음 도덕과 인의로서 치우를 감화시키려 하였으나 치우가 워낙 완강하여 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무력으로 맞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치열하였다. 치우의 군대는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한 81인의 용맹스러운 형제들을 비롯하여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묘민(苗民)이 합세하였다. 



황제의 편에는 천녀(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사방의 신들과 요괴들, 또 큰 봄, 작은 곰, 크고 작은 호랑이, 여우, 승냥이 등 맹수들을 동원하였다. 그들이 주로 싸운 곳은 탁록(涿鹿)인데 그 곳은 예전에 염제가 황제에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탁록전쟁에 등장하는 주역들(치우편) 

치우 풍백 우사 



탁록전쟁에 등장하는 주역들(황제편) 

신도와 울루 응룡 등사 



양쪽 군대의 전투가 벌어지자 과연 치우 군대는 용맹스러움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비록 황제의 용감무쌍한 야수들, 사방의 신들과 요괴들, 인간 세계의 여러 족속들이 있었지만 치우의 적수가 아니었다. 



황제는 연전 연패하여 전황은 황제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번은 원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치우가 갑자기 마법을 부렸다. 콧구멍으로 안개를 온 천지에 내 뿜어 황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황제의 군대는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서 구리머리 쇠 이마에다 뿔이 돋은 치우들은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신출귀몰하듯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닥치는 대로 황제의 군사들을 찍어 죽여서 황제의 군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갔다. 



황제는 전거위에서 보검을 빼어 들고 “포위를 뚫고 앞으로!”를 외쳤지만 황제군대는 짙은 안개 속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안개는 온 천지를 뒤덮은 흰 장막과도 같았다. 황제의 군대는 이 장막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 어려운 때에 황제 진영에 풍후(風后)라는 신하가 북두칠성의 자루가 계절에 관계없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원리를 생각하며 궁리한 끝에 ‘지남거(指南車)’를 고안하여 황제에게 바쳤다. 지남거의 앞에는 쇠붙이로 만든 작은 신선(神仙)을 붙였는데 이 신선의 손가락은 항상 정남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었다. 황제는 이 지남거에 의존하여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무사히 치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 


조선 숙종1년(1675)에 북애노인(北厓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치우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보다 300여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우리 조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치우가 포악한 야만인으로 기록한 중국의 기록과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주장을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규원사화 태시기(太始記)에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황하 북쪽에 살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을 관망하다가 황하유역을 차지 했던 염제 유망씨(楡罔氏)가 무도해서 제후들이 배반하고 민심이 떠나자 씨족 내 장수 81명과 병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을 쳐서 1년 만에 12제후국을 얻고 이 곳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유망이 패주하고 치우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키니 치우와 탁록에서 일전을 벌리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치우는 대승하여 지금의 희수 유역, 산동, 북경, 낙양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황제헌원은 그 후 10여년간에 70여 회나 치우에게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서 죽였다고 한 기록에 대하여 

‘치우의 한 부장이 공을 탐 내 무리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죽은 것을 마치 치우가 잡혀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이 총재관(總裁官)이 되고, 정인지, 사육신 4명 등 집현전 학자 19명이 참여하여 편찬한 전사집(戰史集) 「역대병요(歷代兵要)」의 맨 처음에 ‘황제가 치우를 정벌함’이라는 제목으로 탁록전쟁 경과와 결과가 나오는데 중국측 기록에 따라 쓰고 있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정벌함.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발간 역대병요 제1권) 

여묘족(黎苗族)의 수령 치우(蚩尤)는 전쟁을 좋아하였다. 칼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에 포악스러움을 끼치고 다른 부족을 병탄하였는데, 그 탐욕스러움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염제유망(炎帝楡罔)은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염제는 그를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가 있는 지역에 거주 시켜 서부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치우는 날이 갈수록 악행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공상산(空桑山)에서 염제유망을 공격하였다. 치우의 공략에 견디다 못한 유망은 제위를 사양하고 탁록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에, 황제 공손헌원(公孫軒轅)은 하족 부락의 병력을 소집하여 탁록 평원에서 치우군과 싸웠다. 치우는 풍운 조화를 부려 짙은 안개를 일으켜 헌원군을 공격하였다. 군사들은 길을 잃고 헤맸으나 헌원이 미리 만들어 두었던 지남거(指南車)를 이용하여 사면의 방위를 찾아 대오를 정돈하고 포위를 벗어났으며, 마침내 여묘족을 격파하여 궤멸시키는 한편, 여묘족의 수령 치우를 사로잡아 중기(中冀)에서 처형하였다. 




역대병요 전사를 쓴 사람들은 공자의 가르침 즉 유학(儒學)에 심취한 유학자(儒學者)들로서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春秋)에 ‘황제는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 성군’이고, ‘치우는 포악 무도하고 전쟁을 좋아한 인물’이라는 기록에 따라 중국측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한국문자학회 부회장 김대성씨는 한배달 특집 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우리의 웃음’이란 글에서 ‘중국의 과거 기록들이 탁록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황제의 승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현 중국의 학계는 황제와 치우시대를 ‘신화전설의 시대’로 단정하는 것이 정설인데 이를 뒤엎고 이 시대를 <역사실재시대>라 주장하며 이를 증명해 보이려 했던 중국인 학자 낙빈기(駱賓基: 1917-1994)의 저서「금문신고(金文新攷)」 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과거 기록이나 지금 학자들의 주장처럼 황제가 치우를 이긴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낙빈기의 금문신고의‘(신농, 황제, 치우 간의 복잡한 인척관계 생략) BC2517년 신농이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서 나라를 세우고 43년간 통치하다가 말년에 사위인 황제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전쟁을 하는데 황제에게 패하여 임금자리를 외손자이자 황제의 아들인 소호금천(少昊金天: 신농의 또 다른 사위이기도 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지금의 호남성 쪽으로 내려가 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는 한 번도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임금자리는 황제의 아들이며 신농의 외손자 겸 사위인 소호금천-신농의 손자 전욱고양(顓頊高陽)-소호금천의 손자 제곡고신(帝嚳高辛)으로 이어지는데 이 기간동안 각종 중국의 기록에는 황제에 관한 기록은 꼬리를 감추고 대신 신농의 손자 전욱고양이 할아버지 신농을 위하여 아들 축융을 호남의 제후로 봉하여 할아버지 신농을 돕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 중국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치우(蚩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많은 역사서들은 치우를 ‘포악 무도한 구려족의 군장’으로 기록하고, 동두철액(銅頭鐵額)이니, 돌과 모래와 쇠 가루를 먹으면서 인간의 말을 하고, 머리에 두개의 뿔, 귀 옆에 칼날 같은 빳빳한 털, 소의 발, 눈이 네 개, 손이 여덟 개, 발이 여덟 개, 입으로 안개를 뿜는 재주를 가졌다는 등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도깨비 형상으로 비하하여 기록하면서 치우를 그들의 조상 황제를 받들고 미화하는데 조연격으로 등장시키면서 ‘중국인의 적’으로 생각하며 대체로 부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에게도 치우는 군신(軍神)으로서 병사(兵事)와 관련하여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祭祀)를 지내는 대상(神)으로 삼고, 치우기(蚩尤旗) 깃발, 치우기(蚩尤冀) 별 이름, 치우희(蚩尤戱) 또는 각저희(角低戱) 놀이, 붉은 색의 치우혈등 긍정적인 면도 있다. 



또 최근에 중국인들은 치우를 자기의 조상이라며 모시는 변화까지 보이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치우가 긍정적인 존재를 남아있는 기록들을 찾아본다. 

-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지낸다.(史記의 奉禪書) 

- 유방(劉邦)이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올렸다.(抱朴子) 

- 치우총(蚩尤塚)은 산동성 수장현 관향성에 있는데 높이는 7장이다. 사람들은 10월이면 제사를 모시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필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 이름하여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皇覽의 塚墓記) 

- 치우기(蚩尤旗)는 마치 혜성(慧星)과 같은데 뒷부분이 굽어서 마치 깃발과 같다. 이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는 군사가 있다. 이는 치우천왕을 위로하여 하늘의 별자리로 삼은 것이다.(晉 天文誌) 

치우청황의 능은상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門+敢 鄕城) 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높이가 7척이고 진(秦), 한(漢) 때 주민들이 10월에 여기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때는 반드시 붉은 기운이 마치 붉은 깃발 모양 같이 뻗어나와 사람들이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고 한다.(漢書地理誌)(皇覽 塚墓記) 

* 감향성 치우총이 있었다는 자리는 소설 수호지(水滸誌)의 주무대 양산박으로 변하여 지금은 치우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치우신(蚩尤神)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사람의 몸에 소 발굽이라 하고, 4개의 눈에 6개의 손을 가졌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전해지는 말로 치우씨는 귀에 검극(劍戟)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에 뿔로 사람을 맞닥드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기주악(冀州樂)에는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드린다.--- 한(漢) 때에 만들어진 각저전(角抵戰)은 그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述異記) 

- 탁록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기주(冀州)지방에서는 쇠머리를 쓰고 씨름 하는데 이를 치우희(蚩尤戱)라 한다고 하였다. 각저희(角低戱)의 다른 말이다.(中國舞踊史) 

* 각저희는 한(漢)나라 때의 이름이고, 치우희는 진(晉)나라 때의 이름이다. 

- 송산(宋山)의 붉은 뱀은 그 이름을 육사(育蛇)라고 한다. 그 산 위에는 풍(楓)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는데 치우가 잡혀서 묶였다가 수갑과 사슬을 풀고 간 나무이기에 풍(단풍나무)이라 한다. 

중국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치우가 만들었다는 치우채(蚩尤寨)에 느릅나무 신목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치우목(蚩尤木)이라 부르면서 지금도 당제를 올린다.(山海經 大荒南經) 

태원(太原)의 촌락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모시는데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한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 머리였다.(述異記) 

- 해주(解州)에 염택(鹽澤)이 있는데 120리 되는 물이 모두 붉어서 사람들이 치우혈(蚩尤血)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 곳에서 여름과 가을 사이에 부는 큰 바람을 치우풍(蚩尤風)이라 한다.(宋나라 때 沈括이 지은 夢溪筆談 ) 

- 최근에 와서 중국 사람들이 치우를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염황치(炎黃蚩) 삼조문화(三祖文化)가 제창되면서 탁록의 삼조당(三祖堂)에는 황제 신농과 함께 치우 석상(石像)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상세 후술) 



● 우리민족의 얼 속에 살아 있는 치우(蚩尤) 

▶ 도깨비상(鬼面像): 민족의 무신(武神) 치우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도깨비상으로 오래 동안 ‘국난을 당할 때마다 어떤 침략자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우리 민족의 얼굴’로 여러 곳에 새겨져 전해 왔다. 도깨비상들은 무서운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의 없이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우리 민족의 근엄하고 강건하고 호탕한 기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도깨비(치우상)의 유래에 관한 기록 

- 은(殷)나라 도철(饕餮: 상상의 짐승)→독각기(獨脚夔: 외다리 무서운 짐승, 괴물)→고구려 사신도의(使臣圖: 사신의 얼굴에 도깨비얼굴을 씌움) 

- 중국의 설화집 「유양잡조(유양잡조)」의 기록에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이나 일본이나 간에 모두 신라에서 간 것이다. 

- 우리나라 도깨비는 복을 주는 신으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는 없고 부드럽고 친근하며 왕도깨비는 귀신을 쫓는 벽사신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치우가 황제와 싸울 때 치우부대는 도깨비로, 황제부대는 귀신으로 기록되었는데 치우부대가 황제부대를 제압하고 이긴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 고구려 벽화에 용(龍)과 봉(鳳)도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도깨비상을 들어본다. 



고구려 치우 도깨비상 유물 

- 안악 3호 고분에서 출토된 귀면 돌기둥(4세기) 

- 안악궁 성터에서 출토된 암키와막새 

- 평양 대성구역 안악동 안악궁 성터에서 출토된 귀면판 

- 평양 대성구역 청암리성에서 출토된 귀면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입을 활짝 벌려 호호탕탕하게 웃고 있다. 눈썹도 콧구멍도 웃고 있다. 섬뜩하게 무서운 칼날 같은 송곳니와 이도 입과 함께 웃음을 머금고있다. 얼굴 전체가 자신만만한 힘이 넘쳐 있다. 힘은 넘쳐 있지만 해치려는 살기가 없다. 당당하고 흔쾌한 모습이다. 얼굴 주위에 구름모양, 불꽃모양의 무늬를 둘렀다. 그리고 바깥에는 알이 박힌 둥근 원으로 죽 둘러 새겨 놓았다. 알은 태양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태양의 알, 불의 알은 신농계(神農系) 동이족(東夷族)을 의미한다--(중략)-- 도깨비상은 전쟁의 신이자 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치우(蚩尤) 장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조 치우 도깨비상 유물 

- 창덕궁 교각에 새겨진 귀면상 

- 창덕궁 안을 지나는 개울을 건너는 다리 중심부 귀면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무장의 투구에 장식된 도깨비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쇠도리깨와 쇠몽둥이 손잡이에 새겨진 도깨비상 

- 도깨비상 깃발 

- 막새기와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는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 캐릭터로 정하고 그 해 3월 29일 한국-브라질 경기가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깃발로 첫 선을 보였다. 4500여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1:0으로 이기면서 불패의 신화를 보여 주었다. 붉은 악마는 치우천왕에 대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축구의 빛나는 승리를 지켜주는 상징’이라고 자랑한다.(2002. 6. 15일자 한겨레) 



승리를 목표로 하는 축구경기에서 전쟁의 신, 승리의 상징 치우를 캐릭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깊이 내재한 치우의 발로인 것이다. 



▶ 장승 

- 장승의 특징은 ‘왕방울 눈’인데 이는 모든 악귀에게 위협하여 겁을 주고 접근을 막는 액막이 역할을 하는데 치우천황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치미(蚩尾) 

치미는 궁궐, 능원, 사찰 등 건물의 지붕 위에서 용마루를 지키고 있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망새라는 장식물을 흔히 치미라고 부른다. 원래 용(龍)의 아홉 아들 중 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문(虫+离 蚊)인데 언제부터인지 치우(蚩尤)를 말하는 치미라 불러왔다. 

튼튼한 몸에 씩씩한 기상이 있는 사람을 ‘뚝심이 있다’고 표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때‘독하다’고 말하는 것 등은 모두 치우를 말하는 독 또는 둑 (纛)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국측 기록에 황제는 탁록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국이 안정되지 않자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하고, 중국의 천자가 직접 이끄는 친정대에 이 둑기(纛旗)를 걸었다고 한다. 



▶ 민속에 남아있는 치우 

-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문설주에 붙이는 단오부적 

우리나라 세시 풍속에 5월 단오날에 각 가정에서는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뜻으로 주사(朱砂) 로 벽사문(僻邪文)을 지어 문설주에 붙이는데 이것을 단오부적이라 한다. 조정에서도 관상감에서 해마다 단오부적을 만들어 대궐 안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는다. 부적으로 지은 글에 치우가 들어있다.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之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오월오일 천중지절 상득천록 하득지복 치우지신 동두철액 적구적설 사백사병 일시소멸 급급여율령) 



5월오일 천중절(단오날)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신의 구리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로 사백 네 가지 병 일시에 없애라. 빨리빨리 법 데로 시행하라 

사천왕상(四天王像):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오면서 치우는 절의 입구에서 절과 부처를 지키고,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의 안전을 지켜주는 네 신 사천왕에 등장한다. 네 사천왕은 네 가지 형상으로 다르게 조형되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배 부분에 도깨비 치우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사왕천(四王天)에 있으면서 사방(四方)을 진호(鎭護)하는 네 신(神)이다. 

지국천(持國天)은 동쪽, 광목천(廣目天)은 서쪽, 증장천(增長天)은 남쪽, 다문천(多聞天)은 북쪽을 맡아 지키며,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을 지켜준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불교에서 사천왕에 치우상을 등장시킨 것은 절 문간 청지기로 격하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처의 세계에서도 역시 치우를 강하고 싸움을 잘하는 강자로 인정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중국 탁록(涿鹿)의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에 모셔진 치우상(蚩尤像)의 의미 

1999년 6월 5일부터 17일까지 13일간 한국역사천문학회 13명이 중국 하북성 탁록현을 여행하고 돌아와 부회장 소설가 노고담씨가 쓴 ‘탁록기행’이 「한배달」43호 특집 ‘치우는 살아있다’에 게재되었다. 



이 기행에서 탁록의 황제, 염제, 치우의 여러 유적들을 탐방하였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거대한 성역화구역 중앙에 건립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다. 



삼조당에는 중앙에 황제상(黃帝像)이 있고 그 오른 쪽에 신농상(神農像), 왼 쪽에 치우상(蚩尤像)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벽에는 탁록전투 묘사도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또 이 곳 탁록에는 1990년대에 들어와 중공탁록현위(中共涿鹿縣委) 부서기(副書記)이며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涿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 집행회장(執行會長)이며, 중화염황문화연구회(中華炎黃文化硏究會) 이사(理事)인 임창화(任昌華)라는 사람이‘삼조문화(三祖文化)’를 제창한 것을 계기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될 뿐만 아니라 총건설비 230만 위안 중 100만 위안을 재외화교(싱가폴)의 도움을 받아‘귀근원(歸根苑)’이라는 성역화 지역을 건설하고 그 중심에 ‘중화삼조당’이 건립 하였다고 한다. 그 내력을 보면, 

1993년 10월 임창화는 염제, 황제, 치우가 함께 탁록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사서(史書)와 유적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모아 1차로 ‘염황치(炎黃蚩) 삼조문화(三祖文化)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하염황문화연구원, 중국선진(先秦)사학회, 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등에 제출하였다. 



1995년 9월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연구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삼조문화’가 중국 전국에 소개되고 중국민족문명의 근원적 명제로 널리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되어 국내외에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삼조문화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1)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염제, 황제 뿐만 이니라 치우를 포함한 셋이다. 

(2) 중화만족의 문명을 창시한 염제, 황제, 치우 삼조가 그들이 있는 곳에 대표적인 마을과 마을 연맹공동체를 만들었다. 

(3) 염제, 황제, 치우 삼조는 처음으로 중화문명을 이룩하였는데 그 발자취가 전국 대부분 지역에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탁록전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중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 1980년대 초까지는 그들(선조들) 기록한 역사서를 통해서 한결같이 유일 조상 ‘황제의 자손(黃帝之孫)’이라고 하여 왔는데, 1980년대 말부터 황제헌원과 함께 염제신농을 추가하여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이라 바꾸더니, 1993년 위 임창화의 논문을 계기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 치우까지 그들의 조상에 추가하여 ‘염제, 황제, 치우 삼조의 자손(炎黃蚩之孫)’이라고 그들의 조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초까지 황제를 중국 민족의 유일한 조상으로 받들어 온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측 역사서에 근거하여 몇 천년 간을 중국 사람들이 믿어 온 바이고, 1980년대 말 염제신농을 그들의 조상으로 추가 한 것은 중국의 삼황오제 전설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이 가는 바도 있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사서들이 ‘치우는 구려족의 군장, 포악무도하고, 전쟁을 좋아하고, 동두철액(동두철액) ---’등과 같이 온갖 부정적인 표현으로 폄훼하면서 ‘중국인들의 적’으로 생각하던 치우를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인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삼조당을 지어 염제, 황제와 함께 치우의 석상을 만들어 모시며 떠 받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이 5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에 걸쳐 부정하고, 자기네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포악 무도한 자’로 폄훼하던 치우를 갑자기 자기들 조상이라 하는 저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실 보다는 어떤 목적을 위한 전략, 전술이 아닌가 생각되며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추정 해 본다. 



첫 번째는 현 중국인을 형성하는 민족의 단합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전술의 전환’일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민족에 대해 유화정책을 써 왔다. 형제지국으로 결의를 맺거나, 귀화하는 이민족의 족장에게는 사성(賜姓) 특히 그 왕조의 성씨를 하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달래 왔다. 



지금도 중국에는 한족(漢族)을 제외한 56개에 달하는 소수 민족들이 실존하고 있는데 이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자치(自治)를 허용하는 등 말성이 없도록 달래는 정책을 써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그들은 한족 자체의 구성원에 대하여 눈을 돌린 것이라 생각된다. 엄연히 그 옛날 그들 보다 먼저 중국 대륙의 중요부를 차지하고 이른바 황하문명을 창출에 주역을 했던 치우가 통솔했던 구려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핏줄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인데 이를 계속 외면하는 것은 중국의 단합과 발전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해요인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피 속에는 동이족의 피가 섞여있음을 인정하고 동이족의 가장 뛰어났던 조상 치우를 중국인의 시조에 포함하여 받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대 황하문화와 중국역사를 확보하려는 ‘장기 전략적 포석’일 것이라는 점이다. 고고학의 발달로 중국대륙과 동아사아에서 발굴되는 유물들로 인하여 고대 황하문하의 주인에 대한 베일이 점차 벗어지면서 지금까지 그들의 조상으로 생각해 온 하화족 보다는 동이족이 더 크게 기여 하였다는 것이 사실로 나타날 것에 대비하여 치우와 그 족속(진시황의 중국 통일로 하화족에 동화된 동이족)을 중국 민족으로 흡수해 두려는 속셈일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 사람들이 치우를 자기들의 시조 황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기는 하지만 자기들 조상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얄팍한 전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제대로 찾아 받들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우리 민족의 정신 구석구석에 살아있는 우리의 조상 치우를 어느날 갑자기 족보를 날조하면서 자기네 조상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 결 언 

지금 중국에는 공식으로 인정된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지만 수적인 면에서 그야말로 소수이고 13억 인구(실상은 15억이라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한족(漢族)이다. 한(漢)나라가 있기 전에는 그들을 하화족(夏華族)이라 했다. 



이른바 하화족(夏華族)이라 부르는 중국인들의 조상들은 밖으로는 북쪽의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고, 안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의 동쪽 황하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東夷族)과 삶의 터전을 놓고 쟁탈전을 벌여왔던 것이다. 



이 쟁탈전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뿌리(시조)로 삼아 온 삼황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이 때 치우(蚩尤)라는 동이족의 호전적인 군장과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황제헌원과 그 족속(하화족)은 치우와 그 족속(동이족)에게 워낙 크게 혼 줄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2300여 년을 흘러 진시황까지 내려 온 것이다. 물론 일부 중국 사람들은 치우를 존경하기도 하였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황제가 치우를 죽이고 이겼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이족에게 항상 밀렸기 때문에 하화족은 2300여년 동안 황하 중,상류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진시황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동진을 거듭하면서 밀어 부쳐서 중국대륙 전체를 그들 하화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국토통일을 달성하고, 중국대륙의 동이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동화시켜 민족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진시황의 업적이 그가 저지른 인류 역사상 엄청난 반 인류적 만행도 모두 묻어버리고, 중국의 국토, 민족,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한 강력한 군주로서 그 후의 한(漢)나라 무제(武帝)와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로 숭앙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우리에게 돌려보면 중국 사람들이 적으로 생각하던 치우를 자기 조상이라 받들고 나서는 판국인데 우리는 5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자기 조상을 버린 족속’이란 혹평을 면할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치우는 우리의 역사가 기록으로 확실히 증명되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치우의 얼이 우리 민족정신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은연중에 표출해 왔는데도 우리 조상들은 유학(儒學)에 젖은 나머지 유학의 비조 공자의 평가를 쫓아 황제를 ‘덕치(德治)의 임금’으로 숭앙하고, 치우를 ‘포악무도한 군장’으로 깎아 내려 왔다. 



또 일제는 식민사관으로 아예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삼국시대 이후로 축소하고 신시(神市)는 물론 단군(檀君)의 시대도 한 낱 신화로 돌렸는데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지 58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학자들의 실증사학→일제 식민사관의 수제자인 우리 사학자들은 저들의 기득권(?) 권위(?)에 흠집이나 날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우리측의 기록에 대하여 위서(僞書) 논란이나 벌리면서 인정하기는커녕 연구 대상으로도 삼으려 하지 않는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더 오랜 역사를 내세우고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유물을 조작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겠지만 자기 조상에 관한한 ‘만분의 일의 가능성’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그 꼬투리를 찾아 내고자 하는 것이 사학자의 마땅한 길이요 자세가 아니겠는가. 



치우와 그 후예들은 중국인의 조상 하화족을 척박한 중국 대륙의 서쪽에 묶어 두고 기름진 땅 황하 하류를 차지하여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시기에 황하문명을 일으켰던 우리의 조상이다. 최근 중국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 치우를 자기들 조상이라며 ‘염황치 삼조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진시황의 중국 대륙과 민족통일 이후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로 그 강역이 좁아졌고, 지금은 한반도로 내몰린 작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지금 와서 ‘치우의 강역을 찾자’느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적어도 진실을 알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상을 조상으로 받들 수 있도록 치우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끝 



첨부# 1. 치우(蚩尤)에 관한 기록 비교 

중국측 기록 
한국측 기록 

1.헌원(軒轅) 때에 이미 신농(神農)이 쇠하자 여러 제후들이 (신농)을 침략하여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신농씨는 이들을 정벌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 사용법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모든 제후들은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 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 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귀순하였다. 헌원은---(선정)---곰, 비, 비, 휴, 추, 범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후에야 비로소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 다시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涿鹿)에서 싸워서 결국은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黃帝)이다. (사마천의 史記의 五帝本紀) 



2. 응소(應 召+力)가 말하기를 치우는 옛날 천자(天子)의 호라고 하였다.(史記의 集解) 



3. 관자는 치우가 노산(盧山)의 금을 얻어 5병(五兵)을 만들었으니 보통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索隱) 



4. 공안국(孔安國)은 말하기를 구려(九藜) 임금의 호를 치우라고 한다고 하였다.(史記의 索隱) 



5.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지낸다. 

(史記의 奉禪書) 



6.판천씨(阪泉氏) 치우는 강씨(姜氏) 성으로 염제(炎帝)의 후예다. 군사로 난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했다. 제를 따라 탁록에 살면서 봉선(奉禪)을 하고 호를 염제라 하였다. 

(路史 后紀四 「蚩尤傳) 



7.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응룡(應龍)에게 명하여 기주(冀州)의 들판에서 공격 하였다. 응룡은 물을 관장하였다. 

치우는 풍백(風伯) 우사(雨師)를 청하여 큰 바람과 비를 일으키니 이에 황제가 발(魃)이라는 천녀에게 비가 멈추게 하고, 이어서 치우를 살해하게 하였다. 응룡은 이미 치우를 살해하고 또 과부(夸父)를 살해하였다.(山海經의 大荒北經) 



8. 대황(大荒)의 동북쪽 모퉁이에 흉려토구(凶犁土丘)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응룡은 남쪽 끝에 이르러 치우와 과부를 살해하였다.(山海經의 大荒東經) 



9. 송산(宋山)에 적사(赤蛇)가 있는데 그 이름을 육사(育蛇)라 한다. 그 산 위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풍목(楓木)이라 하는데 그것은 치우가 잡혀 있다가 풀고 간 나무라서 그 이름을 풍목이라 하였다. 

(山海經의 大荒南經) 



10. 옛날 신농은 부수(衣+保 遂)를 벌(伐)하였고, 황제는 탁록을 벌(伐)하여 치우를 잡았다.(戰國策의 秦策) 



11. 구려(九黎)는 치우의 무리인데 치우가 죽은 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보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알고 사방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복종하였다.(尙書) 



12. 치우는 난을 처음 일으켰다. 공안국전에 구려의 임금(君)의 호를 치우라 한다 하였다.(尙書 의 呂刑) 



13. 소호(少昊)가 쇠약한 때에 이르러 구려는 덕(德)을 어지럽히고---그 후예는 삼묘(三苗)가 되니 이는 구려의 덕을 다시 회복된 것이다. 

위소(偉昭)의 주(注)에 이르기를 구려는 려씨(黎氏) 아홉 사람으로 치우의 무리이다. 삼묘(三苗)는 구려이 후예이다. 

(國語의 楚語) 



14. 옛날 황제는 서태산 위에서 귀신과 합방(合房)하였는데 코끼리 수레를 6마리의 이무기로 끌게 하여 화방(華方)으로 가게 하고, 치우는 그 앞에 서고, 풍백은 나아가서 청소하고, 우사는 길에 물을 뿌렸다. 

(韓非子의 十過) 



15. 치우는 천도(天道)에 밝았다. 그래서 황제는 당시(當時)를 맡겼다.(管子의 五行篇) 



16. 헌원이 처음 제위에 올랐을 때 치우씨 형제 72인이 있었는데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였다.(銅頭鐵額) 돌과 쇠를 먹었다. 헌원은 치우를 탁록(涿鹿)들에서 죽였다. --- 

치우신(蚩尤神)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사람의 몸에 소 발굽이라 하고, 4개의 눈에 6개의 손을 가졌다 한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전해지는 말로 치우씨는 귀에 검극(劍戟)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에 뿔로 사람을 맞닥드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기주악(冀州樂)에는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드린다.--- 

한(漢) 때에 만들어진 각저전(角抵戰)은 그(치우전)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태원(太原)의 촌락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모시는데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한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 머리였다. 

(述異記) 



17. 황제가 섭정하기 전에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銅頭鐵額) 모래와 돌을 먹었다. 

(太平御覽의 券七十九引 龍魚河圖) 



18. 태백음경(태백陰經)에 보면 치우는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고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고,---삼병(三兵)의 제도를 두었고, 기치를 세웠다’고 하였다. 

(太平御覽의 券三百三十) 



19. 해주(解州)에는 염택(鹽澤)이 있는데 그 색이 참으로 붉어서---세상 사람들이 치우혈(蚩尤血)이라 한다.(夢溪筆談 券三) 



20. 치우총(蚩尤塚)은 산동성 수장현 관향성에 있는데 높이는 7장이다. 사람들은 10월이면 제사를 모시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필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 이름하여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皇覽의 塚墓記) 



21. 치우는 유망(愉罔)에 이어 스스로 황제를 세우니 호를 염제라 하였는데 역시 판천씨(阪泉氏)이다.(逸周書의 史記篇) 



22. 이어서 적제(赤帝)를 따라 탁록의 들에서 싸우니 사방에 남은 것이 없었다. 적제가 크게 놀라 황제에게 말하여 치우를 잡게 하니 황제는 치우를 중기(中冀)에서 죽였다.(逸周書의 嘗麥篇) 



23. 유방(劉邦)이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올렸다. 

(抱朴子) 



24. 치우기(蚩尤旗)는 마치 혜성(慧星)과 같은데 뒷부분이 굽어서 마치 깃발과 같다. 이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는 군사가 있다. 이는 치우천왕을 위로하여 하늘의 별자리로 삼은 것이다.(晉 天文誌) 



25. 청구(靑邱)는 산동(山東) 청주부(靑州府) 낙안현(樂安縣) 북쪽에 있다. 

(讀史方輿紀要) 



26. 청수박(淸水泊)은 옛날 청구인데 일명 청구낙이라고도 한다.(淸一統誌) 



27. 옛날 치우가 무도하자 황제가 그를 탁록의 들판에서 토벌하니 서왕모(西王母)가 도인을 파견하여 그에게 부(符)를 주었다. 

황제가 단에서 기도를 올리고 친히 부를 받았다. 이를 살펴보니 바로 이전에 꿈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날로 치우(蚩尤)를 사로잡았다. 

(黃帝出軍訣에서 再引用한 北堂書) 



28. 황제가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항상 오색 구름과 금지옥엽이 황제의 머리 위에 감돌았는데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화개(華蓋)를 만들었다.(중국의 옛 신화에서) 



29. 신농씨가 쇠하자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제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덕으로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나---제후들이 모두 신농을 배반하고 황제에게 귀복하여 치우씨를 토벌하자고 하였다.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았다.(帝王世紀) =반대로 해석하면 진실과 맞다.



30. 불주풍은 모든 것을 시들어 죽이는 바람이다. 현명은 북방에서 불주풍을 주관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 중에 서왕모, 치우, 욕수를 제외한 네 번째 죽음의 신이 된 원인 중의 하나다.(神의 起源-五方帝와 五方神) 



31. 호랑이는 가뭄의 여신인 한발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상대(商代)의 그릇들 중에 도철문들이 대부분 호랑이의 모습에서 그 형상을 따오고 있다. 도철은 치우라고 할 때 도철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황제가 한발의 힘을 빌려 치우를 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의 그릇들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상대에서 전승된 한발과 호랑이의 전설은 황제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사기」나「산해경」과 다른 계보에서 전승된 것인지도 모른다. 

치우가 곰족인지 황제가 곰족인지에 대해서는 기록들 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치우는 웅족(熊族), 호족(虎族) 그리고 신농과 같은 양족(羊族)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대(商代)에서 전승된 치우 또는 도철의 형상을 보면 호족의 형상을 하고 있다.진실= 치우는 웅족이며 봉황족이다. 이 에 우등족 양족이 파생된 것이다.호족은 상반되는 적이다.

(중국 고대사회-동문선) 



32. 전설 속의 황제는 서쪽 지역을 호령할 수 있는 패권을 얻고 나서 하북의 탁록지방에서 강하고 사나운 웅족(熊族) 치우를 물리치고 전 중국을 호령하였다. 

탁록은 서부문화구의 가장자리로 동방의 사람들이 서부의 이익을 침입하여 일으킨 전쟁이었을 것이다.(중국 고대사회-동문선) 



33. 치우는 중국에서 금속무기를 발명한 전설 속의 인물이다.(周策縱) 

한(漢) 대의 화석 중에서 치우의 형상은 항시 머리와 사지에 다섯 가지 병기를 든 인물로 그려져 있다.(水野淸) 

치우는 비록 진보된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끝내 황제에게 패하였다. 이 전설은 전국시대에 유가(儒家)의 왕도사상(王道思想) 아래서 생겨난 것으로 황제는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킨 성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만 아니라 근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산동 호남 경내에는 여전히 동과 아연이 혼합된 광물이 많이 있다.(北京鋼鐵學院) 

전설의 치우는 B.C2700년의 인물로 태국과 마가요문화의 청동유적지보다 늦다. 그러므로 그 때 청동무기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전에는 지하 고고자료의 방증이 없었으므로 치우가 병기를 주조했다는 전설은 역사를 좀 더 옛날로 돌이키려는 사람들이 날조했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이미 치우의 시대에 청동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전설을 흘려 버릴 수가 없으며 응당 그 가능성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고대사회-동문선) 


1. 신시(神市) 말기에 치우(治尤)천왕이 있어 청구(靑邱)를 개척하여 넓혔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 임승국의 주석 

원래 치우(蚩尤)라고 적는다. 이른바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머리와 쇠 이마 를 가지고 모래와 쇠가루를 먹고 산다는 치우장군은 그의 시대가 철기시대나 청동기시대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 삼황의 하나인 황제 헌원과 싸워서 번번히 이겼으나 황제의 지남차(指南車)의 위력 때문에 치우는 패사한 것으로 「이십오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의심스러운 바 있으니 치우는 황제가 죽은 뒤 80년이나 생존하면서 지금의 티벳(西藏)으로 판명된 장당경(藏唐京)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치우천왕은 「삼성기전」하편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14세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을 가리킨다. 치우천왕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군신(軍神)이다. 그의 무덤에서 연기 같은 것이 휘날리면 난리가 난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연기 같은 것을 치우기 즉 치우의 깃발이라 한다 하며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치우사당이 모셔져 있다. 

치우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이 강력함을 상징하는 고대 제왕의 이름이다. 앞의 티벳 장당경설은 서경보 스님의 주장이다.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십오사」에 古天子之名(고천자지명)이라 하였고, 왕동령이라는 중국 사학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 고려, Korea의 원음)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고 그의 「중국민족사」에 썼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임승국 注釋) 



2. 단군(檀君)은 ---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3.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나셨는데 귀신 같이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採鑛) 철을 주조(鑄鐵)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그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불렀는데 치우란 속말로 우뢰와 비가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4. 치우천왕게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 고신(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5.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涿)의 북쪽은 대효(大撓)가 있었고, 동쪽에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에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이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하였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6.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다. 그 때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여 천하에 능히 벌 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하였다. 

치우형제가 81인이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7. 14세는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인데 세상에서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8.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淮岱)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檀君世紀, 6세단군 달문 임자 35년 B.C 2049) 



9. 서방의 사명을 태금(太金)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白)이니 호를 청정견허(淸淨堅虛)라 한다. 그를 보조함은 치우라 하고 구화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大喜利)라 한다.(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10. 군사를 주관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다.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세고 용감한 군사의 조상이 되고,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물리치므로 길이 도술의 근본이 되었다.--- 

한나라 고조가 풍패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에 치우에 제사 지내니 북과 깃발에 상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10월에 이르러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평정하고 한나라 왕이 되었다.--4년 후 천하가 안정되자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씨의 사당을 짓게 했다.--- 

「진서(晉書)」천문지에 치우의 깃발을 닮은 혜성 꼬리의 꾸부러진 방향으로 가보면 적병이 반드시 있었다 고 했다. 이것은 치우씨가 별 중에서도 윗자리 별리 된 것이라 하였다.(檀君紀) 



11. 여섯째는 송악의 진주인데 큰 용기와 힘이 있어 신병을 맡아 언제나 나라의 도성을 지켜 외적을 쫓는 옛 치우의 신이다.(檀君紀) 



12.영종25년 기사년(1749) 우역(牛疫)의 전염이 심하여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단을 쌓고 선목에 제사지냈다. 마제단(마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 제사를 지낸다.(燃黎實記述) 



13.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치니 황제가 응룡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치우가 풍백(風伯), 우사(雨師)에게 일러서 큰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니 황제가 가뭄의 신 발(魃)이라 하는 천녀를 내려 보내어 비를 그치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므로 그녀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靑莊館全書-目耳口心書) 



14. 계사년 5월 북극에 치우기(蚩尤箕)가 나타났다. 

(大東野乘-亂中雜錄) 



15. 정축년(선조10년, 1577) 안주의 청천강과 정선의 대음강이 물이 끊어져 흐르지 못한지 수개월이나 되었고, 치우기(蚩尤旗)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사이에 나타나 그 길이가 하늘에 뻗치어 서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걸치어 있었다. 기성과 미성의 위치는 북경지방과 우리나라이고 치우기는 전쟁이 일어날 형상이다.(大東野乘-再造藩邦誌) 



16.기사년 11월 정시(庭試)가 있었는데 서제(書題)는 치우송(蚩尤頌)이었으며, 방(榜)이 나오니 이상질이 문과의 장원이고, 오희철이 무과의 장원이었다. (大東野乘-凝川日記) 



17. 신미년(신라벌휴왕8년, 고구려고국천왕13년, 백제초고왕26년) 치우기(蚩尤旗)가 각(角), 항(亢)의 사이에 나타났다.(東史綱目) 



18. 임금의 말 한마디에 별이 3사(1사: 30리)를 뒷걸음질쳤다는 따위의 얘기는 나는 믿을 수 없다. 꽁지별, 패(孛), 치우 따위가 여러 날 계속되어 온 나라에서 다 볼 수 있는 것은 곧 시국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하늘에 속한다.(星湖僿說-天地門 灾異) 



19. 사전(祀典)에 또 영성(靈星), 마제(마祭), 독제(纛祭)란 명칭도 있다. 영성이란 별은 천전(天田)으로 각성(角星) 왼쪽에 위치하여 천자의 기내(畿內)와 봉강(封彊)을 맡은 귀신이고, 마(마)란 것은 치우의 신인데 병기(干 )를 처음으로 만든 자이며, 독(纛)이란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서(字書)에는 군중(軍中)에 쓰는 대조기(大早旗)인데 군사가 출발하려면 이 기에 제사 지내며 검은 비단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星湖僿說-萬物門 馬祖) 



20. 송서에 이르기를 이우 꼬리로 말(斗)처럼 크게 만든 기를 왼쪽에서 달리는 말 멍에 위에 꽂는다 하였으니 이 것이 좌독(左纛)이라는 것이다. 상고하건데 도(纛)이라는 기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 이름인데 검은 비단으로 치루 머리와 같이 만들어서 군사가 출발할 때 독(纛)에 제사지내는 것이다. 좌독이라는 것은 본래 좌도(左도)라는 것이다. (星湖僿說-人事門 關王廟) 



21. 여형(呂刑)에 옛날부터 교훈이 있는데 치우가 최초로 난을 일으켰다 하고, 이어서 삼묘(三苗)의 백성이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마련하여 다섯 가지 학형(虐刑)을 사용했다 하였다. 

그 주의 국어(國語)에 소호(少昊)가 쇠해질 무렵에 구여(九黎)가 혼란을 일으키자 백성과 귀신이 서로 뒤섞여서 집집마다 무당이 생기게 되었는데 나중에 와서 삼묘가 구려를 회복시켰다 하였다. 이 문맥으로 본다면 이 구려(九黎)는 치우의 나라였던 것이다. 

공안국(孔安國)도 구려의 임금 이름은 치우이다. 치우는 큰 안개를 잘 일으켜서 군사를 혼미하게 만들므로 헌원이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정벌했는데 치우는 남쪽이었다. 남쪽을 향해 정벌하게 되었던 까닭에 이 지남거 제도를 만들었다.이는 주공(周公)이 월상(越裳)에 지남거를 하사 한 것과 같은 의미다. 라고 하였으니 구려가 삼묘였다는 것을 더욱 증거 할 만하다. 

관자(管子)는 황제가 치우를 얻어 천도(天道)를 밝혔고, 태상(太常)을 얻어 지리(地利)를 살폈고, 청제(靑帝)를 얻어 동방(東方)을 분별했고, 축융(祝融)을 얻어 남방(南方)을 밝혔고, 대봉(大封)을 얻어 서방(西方)을 분별했고, 후토(后土)를 얻어 북방(北方)을 분별했다. 황제가 육상(六相)을 얻어서 천하가 화성(化成)했다 하였다. 치우는 바로 황제의 신하로서 난리를 일으켜 베임을 당한 것이다. 

(星湖僿說-經史門 蚩尤) 



22. 고시씨 또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예가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씨 후손은 서남지방을 차지하고 살았으며, 신지씨 후손은 북동지방에 많이 살았는데 유독 고시씨의 후손만은 넓은 동남으로 옮겨가서 진한, 변한의 여러 갈래가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삼한인데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 세 씨족의 후손은 또 아홉 파로 갈라졌는데 견이(畎夷), 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의 족속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조상은 같아서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夷)라는 것은 큰 활(大弓)을 말하는 것인데 치우씨가 칼과 창과 큰 활을 만든 후 사냥과 싸움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겨레를 ‘이(夷)’라 한다. 「설문(說文)」에 동이(東夷)는 큰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면서 이(夷)를 융(戎), 적(狄) 등과 함께 상스럽고 더러운 이름으로 뒤집어 놓았다. 

후세에 견이, 풍이는 서남으로 나뉘어 옮겨 살았다. 풍이(風夷)는 치우의 한 족속이다.---지금도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지위(知爲)라 하는 것은 치우라는 말이 잘 못 전해진 것이다.(揆園史話 太始記) 



23. 회대(淮岱)와 강희(江淮)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으나 온 나라에 도가 시들어감에 따라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해 들어갔다. 바닷가 백성들이 모두 그 군사를 반갑게 환영했다. 치우씨가 거기에서 물러 나온 후 그 곳에 그렇게 왕성해지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과 함께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다가 유망(愉罔)이 쇠하여 약해진 것을 보고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형제와 친척 중에서 우두머리 될 만한 사람 81명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어 칼과 창, 화살촉을 꾸준히 만들게 했다. 군사를 한데 모아 정비하여 탁록(涿鹿)을 떠나 구혼(구혼)에 가서 계속 싸워 이겼다. 그 기세는 마치 비바람 같아서 세상 만물이 두려워서 떨게 하여 그 위력을 천하에 떨치었다. 

그는 일년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옹호산)에 가서 수금(水金)을 캐서 예과(예戈)와 옹호창(옹호槍)을 만들었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양수(양수)를 떠나 공상(공상)으로 쳐들어갔다. 공상이란 지금의 진류(진류)인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일년 동안에 다시 12제후국을 빼앗았는데 시체가 들에 가득 차서 중국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거나 숨어버렸다. 

이 때 유망은 소호(少昊)에게 치우씨를 막게 했다.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둘러 소호와 크게 싸우며 안개를 일으켰다. 소호는 넋을 잃고 혼란에 빠져 크게 패하여 공상으로 달아났다. 

소호는 유망과 함께 달아나다가 탁록 들로 들어갔다. 이 때 치우는 공상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 이어 군사를 탁록 들로 돌려 유망을 포위하니 유망은 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관자(管子)가 천하의 임금이 칼을 들고 노하면 쓰러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 한 것이다. 

이 때 헌원(軒轅)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도전했다. 치우씨는 탁록 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 때 군사를 풀어서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수 없었다. 또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리하여 치우씨는 회대(淮岱: 淮水와 岱山 사이의 땅)와 가연(가연)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 중국 사람들은 활과 돌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사용할 줄 몰랐다. 또 치우씨의 높고 강한 법력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서 싸우면 지고 만 것이다. 

운급(운급)의 「헌원기(軒轅記)」에 치우씨가 비로소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여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라 했다고 한 것이 그 말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사를 가다듬고 사방을 쳐 나갔다. 10년 동안에 헌원과의 싸움만도 70여 회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병사들 또한 후퇴하지 않았다. 

헌원은 이미 여러 번 패했으나 다시 병마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리고 치우씨를 본받아 갑옷을 만들어 널리 입게 하고 지남차를 만들어 날을 잡아 싸웠다. 

이 때 치우씨는 하늘을 우러러 형상을 보고 사람의 마음을 살피니 중국의 왕성한 기운이 점점 번창하고 또 염제의 백성이 굳게 단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 잡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사람이 각각 제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쓸데없이 죄 없는 백성을 죽일 수 없구나 하고 되돌아 왔다. 

이리하여 치우씨는 형제와 친척에게 적과 크게 싸워 위엄을 세워 적이 다시는 쳐들어 올 생각을 못하게 하고 헌원과 싸워 한 진을 모두 죽인 후에 물러나왔다. 이 때 한 부장이 공을 서둘러 싸우려 하다가 진 안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치우씨를 사로잡았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글이다. 

치우씨는 회대 땅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마침내 치우가 죽자 점점 뒤로 물러났다.「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 무덤이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長縣) 관향성(關鄕城) 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다섯 길이라고 하였다. 

진한 때 백성이 시월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비단폭과 같은 붉은 기운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이것을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 그 뛰어난 혼과 씩씩한 넋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천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 왔지만 중토는 이 때문에 쓸쓸해지고 유망이 다시 복위하지 못하여 염제의 뒤는 이로써 끊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어 황제(黃帝)가 되었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 여러 명이 오래도록 유청(유청)에 살면서 그 명성과 위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편안치 못했다. 

「사기(史記)」에 소위 산을 해쳐 길을 만들어도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을 정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느라 한 곳에 살지 못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영문을 지켰다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치우씨를 두려워하고 겁냈는가를 말 해 주는 것이다. 

「상서(尙書)」여형(呂刑)편에 옛부터 내려 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난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는 그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그러한 훈계를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 후 삼백여 년간 아무 일 없었으나 다만 소호씨와 싸워 이겼으며 단군(檀君)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가 궐천년(궐千年: 오랜 세월을 말한다.궐은 만이란 말이다)이나 된다. 

궐천세(궐千歲)라 한 것은 신시씨(神市氏)의 나라가 만천세 이르도록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신시씨 이후 고시씨(高矢氏)와 치우씨(蚩尤氏)가 서로 이어 임금이 되었다. 

(揆園史話 檀君記) 

도깨비로 세속화 된 치우(蚩尤).

산해경에 서술된 치우(蚩尤)에 관한 부분을 차례대로 서술하겠습니다. 
  원문(原文)은 원가(袁珂)의 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를 인용했으며, 해석은 율곤 이중재 선생의 산해경 편역을 위주로 삼았습니다.

  1. 해외서경(海外西經) 편

  形天與帝至此爭神, 帝斷其首, 葬之常羊之山…
  형천은 황제와 이곳에 이르러 신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했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잘라 상양산에 묻었다…
(주석)
  御覽七九引歸藏…昔黃神與炎神爭鬪 鹿之野…
  呂氏春秋蕩兵篇…黃炎故用水火矣.
  淮南子兵略篇…炎帝爲火災, 故黃帝禽之.
  大戴禮五帝德…黃帝敎熊  豹, 以與赤帝戰於版泉之野…炎帝兵敗, 乃又蚩尤 起以與黃帝 抗. 蚩尤者炎帝之後.
(玉函山房輯佚書輯遁甲開山圖), 亦炎帝之臣也.
(世本宋衷注), 大荒北經謂蚩尤作兵伐黃帝者, 蓋爲兵敗之炎帝復仇也. 
蚩尤與黃帝之戰, 乃古代神話傳說中一大戰爭.
  태평어람 79권의 귀장편에는, 옛날 황제와 염제가 탁록의 들에서 싸움을 했다.
  여씨춘추 탕병편에는, 황제와 염제는 물과 불을 사용했다.
  회남자 병략편에는, 염제는 화공을 사용했고, 황제는 맹수를 이용했다.
  대대례오제덕편에서는, 황제는 곰·큰곰·흰여우·표범(율곤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말 그대로의 짐승이 아니라, 웅부족·피부족·비부족·표부족을 뜻한다고 합니다)을 길들여, 판천의 들에서 적제(염제 신농씨)와 전쟁을 치렀다.… 
   염제의 군사가 패했다. 이에 치우가 떨치고 일어나 황제에게 항전했다.  치우는 염제의 후손이다.
  옥함산방집일서에 있는 둔갑개산도에는, 또는 염제의 신하다
   세본의 송충 주석에서는, 대황북경에서 치우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쳤다는 것은, 대체로 전쟁에 패한 염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이다.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고대신화전설 중에서의 일대 전쟁이었다.

    山海經復涉 父謂應龍(黃帝神龍)已殺蚩尤又殺 父,  (大荒北經), 應龍殺蚩尤與 父,
  (大荒東經),  父者, 大荒北經云, 后土生信, 信生 父.
   而海內經謂后土爲炎帝之裔, 是 父亦炎帝之裔也.
  산해경 과보( 父)편에 의하면, 응용은 황제의 신룡(神龍)인데 치우(蚩尤)를 죽였으며 또한 과보( 父)도 죽였다고 적고 있다.
  대황북경에서는 응용이 치우와 과보를 죽였다.
 대황동경에서는, 과보( 父)는 대황북경에서 이르기를, 후토가 신을 낳고, 신이 과보를 낳았다. 해내경(海內經)에 의하면, 후토는 염제(炎帝)의 후손인데, 이에 과보 역시 염제의 후손이다.
  在黃帝與蚩尤之戰中, 
 父自亦當參加蚩尤戰團, 因而始相繼爲應龍所殺蚩尤與 父喪亡後, 乃又有刑天舞其干戚, 
與帝爭神.
  刑天者炎帝之臣, 或亦炎帝之後也.…
  則刑天者, 亦猶蚩尤 父, 奮起而爲炎帝復仇, 以與黃帝抗爭者也.
  황제와 치우의 전쟁 중에 과보는 스스로 치우의 전단에 참가했다.
  인해 처음과 서로 연결한다면, 응용이 치우와 과부를 죽여 장사지내고 난 후에 또다시 형천이란 자가 있어 방패와 도끼를 휘두르며 제왕과 신의 자리를 두고 싸우려 했다.
  형천은 염제의 신하라고도 했고,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즉 형천은 치우와 과보와 같이 염제의 원수를 갚고자 떨치고 일어나, 황제와 맞서 싸운 자이다.

  常羊山之北, 經歷數地卽是軒轅國, 軒轅, 黃帝之號, 則葬首常羊之刑天所與爭神之帝, 豈非黃帝而何.
  蓋軒轅常羊一帶, 均屬黃炎鬪爭神話傳說之範圍.…
  상양산 북쪽에는 옛날에 헌원국이 있었다. 헌원은 황제의 호이다.
  즉 상양에 머리가 파묻힌 형천과 더불어 신의 자리를 두고 싸운 제왕은 어찌 황제가 아니겠는가.
  헌원국이 있던 상양의 일대에는 황제와 염제의 싸움에 관한 신화와 전설이 고르게 퍼져있다.

  是蚩尤刑天諸巨人前 後繼鬪爭情神之最好寫照也.
  而陶潛讀山海經詩稱, 刑天舞干戚猛志固常在.
  爲尤能得此斷頭英雄凌 無前之神態.

  치우와 형천은 모두 거인으로, 그 앞에 엎드리건대  뒤를 이어 싸운 그 정신은 길이 빛날 것이다.
  도잠의 독산해경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형천이 방패와 도끼를 휘둘렀던 굳센 뜻이 여전히 남아있네.
  능히 머리는 잘리게 되었으나, 그 영웅의 기개는 신의 태도라고 할만하다.


  2. 해외북경(海外北經) 편

     父與日逐走.入日. 渴欲得飮. 飮于河渭河渭不足. 北飮大澤. 末至. 道渴而死.  其杖 化爲鄧林.
  (주석)
  而姜姓之蚩尤, 亦獸身人語, 銅頭鐵額.
 (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 齒長二寸.
 (述異記)…是炎帝裔屬中, 顔不乏魁梧奇偉之巨人也.

  강(姜)씨 성을 가진 치우는 역시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지니고 있었다.
  치우(蚩尤)가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호랑이(虎)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머리가 구리라는 것은 머리에 구리로 된 투구를 썼다는 뜻이며, 이마가 철이라고 한 것은 쇠처럼 강인하다는 것을 뜻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8권에서 용어하도(龍魚河圖)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이빨이 이촌(二寸, 6㎝)이라고 적고 있다.
 술이기(述異記)에는, 염제(炎帝)의 후손에 속하는 가운데 치우치지 않는 뛰어난 우두머리로 기이하고 위대한 거인(巨人)이라고 되어 있다.


  3.  대황동경(大荒東經) 편
  大荒東北隅中. 有山名曰凶 土丘. 應龍處南極. 殺蚩尤與 父. 不得復上. 故下數旱. 旱而爲應龍之狀. 乃得大雨.

  대황(大荒)의 동북 모퉁이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을 흉여토구(凶 土丘)라고 한다. 응용은 남쪽 끝에 살고 있는데, 치우와 과보를 죽이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수없이 가뭄이 들었는데, 가뭄이 들 때마다 응용의 형상이 나타나면 큰비가 내린다고 했다.  

  (주석)
   懿行云…史記五帝紀索隱引皇甫謐云…黃帝使應龍殺蚩尤於凶黎之谷. 卽此, 黎, 犁古字通.
  珂案, 唐王瓘軒轅本紀(見雲 七籤卷一百)云…(黃帝)殺蚩尤於黎山之丘, 
說本此,  然蚩尤被殺之地.

  학의행이 이르기를, 사기 오제기의 색은을 인용하여 황보밀(皇甫謐)이 말한바에 의하면, 황제의 사신인 응용이 치우(蚩尤)를 죽인 곳은 흉여곡(凶黎谷)이라 했다. 여(黎)는 여( )의 옛 글자와 통용된다.
  원가는 당(唐)나라 왕관의 헌원본기(운급칠첨 100권)에 의하면,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여산구(黎山丘)에서 죽였다고 했는데, 설명하자면 본래 이곳으로 치우가 피살된 땅이다.
  或又傳在南方. 
大荒南經云…有宋山者, 有木生山上, 名曰楓木. 楓木, 蚩尤所棄其桎梏, 是謂楓木.
  郭璞注云…蚩尤爲黃帝所得, 械而殺之, 已摘其械, 化而爲樹也.
  혹은 남방에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대황남경에 의하면 송산(宋山)이 있는데,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데, 이름을 풍목이라 했다. 풍목은 치우가 찼던 쇠고랑과 족쇄가 화해 풍목이 되었다고 했다.
  곽박의 주석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에게 잡히자,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워 죽였는데, 그 형틀이 화해서 나무가 되었다고 했다.
  或又傳在東方. 
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蚩尤出自羊水, 八肱, 八趾, 疏首, 登九 以伐空桑, 黃帝殺之靑丘. 靑丘, 東方地名也.
  전하는바에 따르면 혹 동방에 있다고도 했다.
  초학기 9권에서 귀장계서에서 인용한바에 의하면, 치우가 스스로 나온 곳은 양수(羊水)이며, 8개의 팔(뚝)과 8개의 발이 있었고, 그리고 머리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구요에 올라 공상(空桑)을 치고자 했으나, 황제가 그를 청구에서 죽였다.
  청구는 동방의 지명이다.
  或又傳在中冀. 
周書嘗麥篇云…蚩尤乃逐帝(赤帝), 爭于 鹿之河(阿)也. 赤帝大 , 乃說於黃帝, 執蚩尤殺之於中冀, 用名之曰絶 之野.
  中冀蓋卽大荒北經所記冀州之野, 亦卽 鹿之河(阿)也.
  然路史後紀四云…(黃帝)傳戰執尤於中冀而誅之, 爰謂之解. 解者, 宋之解州, 今山西之解縣也.
  沈括夢溪筆談卷三云…解州鹽澤,  色正赤, 俚俗謂之, 蚩尤血.
  則解州雖不必如路史所附會之中冀, 後世固亦有蚩尤被殺於其地之神話也.
  蚩尤被殺之地, 於不同之諸說中, 要以冀州之野卽 鹿之阿爲近正.
  至此經之凶犁土丘固應龍所居之地, 未必卽蚩尤 父被殺之地, 云黃帝使應龍殺蚩尤於此丘者, 亦由誤讀經文而生之附會.
  혹 전하는 말로는 중기에 있다고도 한다.
  주서(周書) 상맥편(嘗麥篇)에 이르기를…치우는 적제(赤帝:炎帝神農氏)를 좇아 탁록하( 鹿河, 또는 탁록의 언덕)에서 전쟁을 했다. 적제가 크게 두려움에 떨었는데, 황제가 치우를 잡아 중기에서 죽였다. 중기는 절비야라고도 한다.
  중기는 대황북경(大荒北經)에 기록된바에 의하면, 기주의 들이라고 했는데, 탁록하( 鹿河) 또는 탁록의 언덕이라고도 했다.
  그런즉 노사 후기 4에 의하면…황제가 치우를 잡아 중기에서 주살했는데, 중기는 해(解)라는 곳을 말한다. 해는 송나라 때의 해주이며, 지금의 산서성 해현이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3권에 의하면, 해주의 염택은 소금색깔이 검붉다. 세상사람들은 치우의 피라고 말했다.
  즉 해주는 비록 노사에서 말하는 중기와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후세에는 치우가 피살된 곳이 그곳이라는 신화로 굳어져있다.
  치우가 피살된 곳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중에서 기주의 들이 탁록의 언덕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흉여토구는 응용이 사는 땅으로, 반드시 치우와 과보가 피살된 곳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응용을 시켜 치우를 이 언덕에서 죽였다고 하는 것은, 경문의 오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郭璞云…蚩尤作兵者.
  珂案…管子地數篇云…葛盧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劍, 鎧, 矛, 戟, 雍狐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雍狐之戟, 芮戈.
  呂氏春秋蕩兵篇云…人曰…蚩尤作兵.
  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蚩尤造立兵杖, 刀, 戟, 大弩.
  곽박에 의하면, 치우는 병기를 만들었다.
  원가 자신이 살펴보자면, 관자 지수편에 이르기를, 갈로산(葛盧山)에서 물이 발하여 나올 때 금(金)을 생하므로, 치우가 이를 제련하여 칼과 투구, 세모난 창과 두갈래 창을 만들었다.
  옹호산(雍狐山)에서도 물이 발하여 나올 때 금(金)이 생하므로, 치우가 이를 제련하여 옹호극이라는 창과 예과라는 창을 만들었다.
  여씨춘추 탕병편에 의하면…사람들이 말하기를 치우가 병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태평어람 78권 용어하도를 인용하자면, 치우가 도(刀), 극(戟), 대노(大弩)라는 병기를 만들었다.

東海中有流波山. 入海七千里. 其上有獸. 狀如牛. 蒼身而無角. 一足. 出入水則必風雨. 其光如日月. 
其聲如雷. 其名曰夔. 黃帝得之以其皮爲鼓.  以雷獸之骨. 聲聞五百里. 以威天下. 
  (주석)
  珂案…流波山一足夔神話亦黃帝與蚩尤戰爭神話之一節.
  繹史卷五引黃帝內傳云…黃帝伐蚩尤,  玄女爲帝製夔牛鼓八十面, 一震五百里, 連震三千八百里.
  吳任臣山海經廣注(大荒北經)引廣成子傳云…蚩尤銅頭啖石, 飛空走險, 以 牛皮爲鼓, 九擊止之, 尤不能飛走, 逐殺之. 卽其事也.

  원가의 안에 의하면, 유파산의 외발 기의 신화 역시 황제와 치우와의 전쟁과 관련된 신화의 한 대목이다.
  역사 5권에서 황제내전을 인용한바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를 칠 때, 현녀(玄女)가 황제를 위해 기우( 牛)로 80면 짜리 북을 만들었는데, 북을 한번 울리면 그 진동이 5백리에 이르렀고, 여러번 울리면 3천8백리까지 울렸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대황북경의)에서 광성자전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치우는 구리로 만든 머리에 돌가루를 먹었다. 그 몸은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비호같았다.
  이에 규우( 牛)의 껍질로 만든 북으로 9번을 공격한 끝에야 치우가 더 이상 날고 달리지 못해, 추격하여 죽일 수 있었다. 즉 그 사실이다.


  4.  대황남경(大荒南經) 편

 有宋山者. 有赤蛇. 名曰育蛇. 有木生山上名曰楓木. 楓木. 蚩尤所棄其桎梏. 是爲楓木.

  송산이 있다. 송산에는 붉은 백이 있는데, 이름을 육사라고 한다.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데 이름을 풍목이라한다. 풍목은 치우가 찼던 쇠고랑과 족쇄가 버려진 것이, 화해 풍목이 되었다.

 (주석)
  路史後紀四蚩尤傳于紀蚩尤被殺之後…後代聖人著其像于尊 , 以爲貪戒.
  其說當有所本. 羅 注云…蚩尤天符之神, 狀類不常, 三代 器, 多著蚩尤之像, 爲貪虐者之戒. 其狀率爲獸形, 傳以肉翅.

  노사후기 제4 치우전에서 치우가 피살된 후에…후대 성인들이 치우의 상을 만들어 떠받드는 것은 탐심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위의 설을 뒷받침하는 글로는, 나평의 주에 이르기를, 치우는 천부신(天符神)으로서 그 형상이 보통과 달랐다. 삼대에 걸쳐 치우의 상이 많이 그려졌는데, 탐욕과 포학함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 형상은 몸에 날개가 있다고 전해지는 짐승의 형상을 따랐다.


  吳任臣山海經廣注(大荒北經)引博古圖略同此說. 揆其所說, 殆  也.
  左傳文公十八年云…縉雲氏有不才子, 貪于飮食, 冒于貨賄, 侵欲崇侈, 不可盈厭., 聚斂積實, 不知紀極., 不分孤寡, 不恤窮 , 天下之民, 以此三凶, 謂之  .

  오임신 산해경광주(대황북경)에서 박고도를 인용한바에도 대략 이 설과 동일하다. 그 설을 살펴보자면, 도철에 가깝다고 했다.
  좌전 문공(文公) 18년에 의하면, 진운씨에게 재능이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음식을 탐하고, 돈과 재물을 침탈하며, 사치와 낭비벽에 욕심이 과하여 억제하지 못했으며, 재물을 긁어모아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알지 못하고 기고만장했으며, 고아나 과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을 궁휼함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흉악한 세 가지를 들어 도철이라고 했다.

  史記五帝本紀集解引賈逵曰…縉雲氏, 姜姓也, 炎帝之苗裔, 當黃帝時任縉雲之官.
  而蚩尤姜姓, 亦炎帝之苗裔, 故說蚩尤卽是此縉雲氏之不才子,   , 乃大有可能也.
  大戴禮用兵篇云…蚩尤, 庶人之貪者也. 與  ,   之貪 , 義固相應, 故古以蚩尤比於  …  

    사기 오제본기집해에서 고규가 인용하여 말하기를, 진운씨는 강(姜)씨 성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예인데, 황제 때에 진운씨는 관리였다.
  치우도 강(姜)씨 성이다. 역시 염제신농씨의 후예이다. 
옛 설에 의하면 치우는 바로 이 진운씨의 불재자, 도철이라함은 크게 가능함이 있다.
  대대례 용병편에는, 치우는 서인으로 탐심이 많은 자였다. 포효와 도철의 탐욕은 서로 상응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옛날에 치우를 포효에 비유하기도 했다.


  皇覽 墓記云…蚩尤 , 在東平郡壽張縣 鄕城中, 高七丈, 民常七月祀之.
  述異記亦云…太原村落間祭蚩尤神不用牛頭. 又云…今冀州有樂名蚩尤戱, 其民兩兩三三, 頭載牛角而相 ..

  황람 총묘기에 의하면, 치우총은 산동성 동편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는데, 높이가 7장(七丈)이다. 백성들은 항상 7월이면 제사를 지낸다. 
  술이기에 의하면 태원(太原) 촌락간에도 치우신(蚩尤神)에 대해 소머리를 사용하지 않고 제사지낸다고 했다. 또한 지금 기주에는 치우희(蚩尤 )라는 놀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둘둘 삼삼으로 소뿔을 머리에 이고 서로 찌르는 놀이이다. 

  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黃帝)制伏蚩尤, 以制八方, 蚩尤沒後, 天下復擾亂不寧, 黃帝遂 蚩尤形象, 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爲殄服.

  태평어람 78권에서 용어하도를 인용바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를 항복시키고 팔방을 제압하고자 했다.
   치우가 몰락된 후에도 천하가 여전히 어지럽고 편안하지 못하자, 황제는 천하를 위압하고자 치우를 형상을 그렸다. 천하가 모두 치우가 죽지않았다고 하므로, (치우의 형상으로 치우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천하를 모두 복종시키기 위함이었다.


  5.  대황북경(大荒北經) 편

  大荒之中. 有山名曰成都載天. 有人珥兩黃蛇. 把兩黃蛇. 名曰 父. 后土生信. 信生 父.  父不量力. 欲追日景. 逮之于 谷. 將飮河而不足也. 
將走大澤. 未至. 死于此. 應龍已殺蚩尤. 又殺 父. 乃去南方處之. 故南方多雨.


  대황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은 성도재천이다. 
양쪽 귀에 누른 뱀을 걸고 있으며, 양손에 누른 뱀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을 과보( 父)라고 했다.
  후토(后土)가 신(信)을 낳았고, 신(信)은 과보를 낳았다. 과보는 역량이 부족했다. 해를 쫓아가다가 우곡에 이르렀다. 갈증이 나서 황하(黃河)의 물을 마셨으나 부족하여 다시 대택(大澤)으로 달려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응용은 치우를 죽이고 다시 과보를 죽인 후 남쪽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남방에는 비가 많았다.

  
  (주석)
  珂案…蓋 父乃古巨人族名(玄珠中國神話硏究 ABC說), 非一人之名也.
   父逐日與應龍殺蚩尤與 父, 蓋均有關 父之不同神話.


  원가에 의하면, 과보는 고대 거인부족의 이름이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현주의 중국신화연구 ABC설에서).
  과부축일( 父逐日)이라는 말과 응용살치우여과보(應龍殺蚩尤與 父)라는 말은 과보와 연관된 서로 다른 신화라고 할 수 있다..


  有係昆之山者. 有共工之臺. 射者不敢北鄕. 有人衣靑衣. 名曰黃帝女魃.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命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魃不得復上. 所居不雨. 
叔均言之帝. 後置之赤水之北. 叔均乃爲田祖. 魃時亡之. 所欲逐之者. 令曰. 神北行. 先除水道. 決通溝瀆.

  계곤산이 있다. 공공(共工)의 누대가 있는데,, 활을 쏘는 자는 감히 북쪽을 향하지 못한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황제여발(黃帝女魃)이다.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는 응용에게 명하여 기주의 들에서 치우를 공격하게 했다.
  응용이 물을 모아둔 곳을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큰비바람을 몰아치게 했다. 이에 황제가 천녀인 발을 내려보냈다. 발은 비를 그치게 하고 치우를 죽였으나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으므로, 그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아니했다. …

 (주석)
  珂案…太平御覽卷七十二引世本云…蚩尤作兵.
  宋衷注云…蚩尤, 神農臣, 是也, 則所謂蚩尤作兵伐黃帝者, 蓋黃炎鬪爭, 炎帝兵敗, 蚩尤奮起以與炎帝復仇也.

  원가가 살펴보자면, 태령어람 권72에서 세본을 인용하여 이르되, 치우가 병기를 만들었다. 송충의 주에서 이르기를, 치우는 신농씨의 신하다. 라고 하는 것은 치우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쳤는데, 대체로 황제와 염제의 싸움이다. 
염제의 군사가 패하자 치우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염제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珂案…關於黃帝與蚩尤戰爭之神話, 古來傳說多端.
  較早者有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蚩尤出自羊水, 八肱, 八趾, 疏首, 登九 以伐空桑, 黃帝殺之靑丘.
  其後太平御覽卷七八引龍魚河圖云 黃帝攝政前, 有蚩尤兄弟八十一人,  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 刀, 戟, 大弩, 威振天下.
  誅殺無道, 不仁不慈. 萬民欲令黃帝行天子事. 黃帝仁義, 不能禁止蚩尤, 遂不敵, 乃仰天而歎, 天遣玄女下授黃帝兵信神符, 制伏蚩尤, 以制八方
  蚩尤沒後, 天下復擾亂不寧, 黃帝遂 蚩尤形象, 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爲殄服.…

  원가가 살펴보자면, 황제와 치우간에 관련된 전쟁의 신화는 고래 전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초학기 9권에서 귀장계서를 인용한바에 의하면, 치우가 스스로 나온 곳은 양수(羊水)이며, 8개의 팔(뚝)과 8개의 발이 있었고, 그리고 머리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구요에 올라 공상(空桑)을 치고자 했으나, 황제가 그를 청구에서 죽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8권에서 인용한 용어하도에 의하면, 황제가 섭정하기 전에 치우가 있었는데, 형제가 81명이었다.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치우(蚩尤)는 구리로 만든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래와 돌가루를 먹었다. 그리고 칼, 창, 대노(大弩)와 같은 병기를 만들어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무도했으며, 어질지도 않았고, 자비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황제가 천자의 일을 행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제는 인의는 있었으나, 능히 치우를 감당할 힘이 없었고, 치우를 대적하지 못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자, 하늘에서 현녀를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현녀로부터 군사들에게 믿음을 주는 신부(神符:신의 진리)를 부여받고 치우(蚩尤)를 굴복시키게 되었으며, 팔방(천하)을 제압했다.
    치우가 몰락된 후에도 천하가 여전히 어지럽고 편안하지 못하자, 황제는 천하를 위압하고자 치우를 형상을 그렸다. 천하가 모두 치우가 죽지않았다고 소란하므로, (치우의 형상으로 치우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천하를 모두 복종시키기 위함이었다.

  御覽十五引黃帝玄玄戰法云…黃帝與蚩尤九戰九不勝. 黃帝歸於太山, 三日三夜, 霧冥.
  有一婦人, 人首鳥形, 黃帝稽首再拜伏不敢起, 婦人曰, 吾玄女也, 子欲何問. 黃帝曰, 小子欲萬戰萬勝. 受得戰法焉.…

    어람 15권에서 인용한 황제현현전법에서 이르기를, 황제는 치우와 9번을 싸웠으나 9번 모두 이기지 못했다. 황제는 태산으로 돌아갔는데, 삼일 밤낮으로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사람의 머리에 새의 형상을 한 부인이 있었다. 황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 엎드려서는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이 말했다. 나는 현녀이다. 그대는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
  황제가 말했다. 나는 싸움에 임할 때마다 이기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전법을 전수받았다.

  尙有御覽卷十五引志林(晉虞喜撰)云…黃帝與蚩尤戰於 鹿之野, 蚩尤作大霧彌三日, 軍人皆惑. 黃帝乃令豊后法斗機以別四方, 遂擒蚩尤.
  通典樂典云…蚩尤氏帥 魅以與黃帝戰於 鹿, 帝命吹角作龍吟以禦之.

   어람 15권에서 인용한 지림(진나라 우희 찬)에 의하면, 황제와 치우는 탁록의 들에서 싸웠다. 치우가 3일 동안이나  큰 안개를 피워내자, 황제의 군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이에 풍후에게 영을 내려 두기(斗機)를 만들게 하여 사방을 분별하고는 치우를 사로잡았다.
  통전 낙전에 의하면 치우씨는 이매( 魅)를 거느리고 황제와 탁록에서 전쟁을 했다. 황제는 영을 내려 뿔을 불게 하고 용을 불러내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막았다.


  述異記雜敍蚩尤 事云…蚩尤能作雲霧.  鹿今在冀州, 有蚩尤神, 俗云, 人身牛蹄, 四目六手.
  今冀州人掘地得  , 如銅鐵者, 卽蚩尤之骨也. 今有蚩尤齒, 長二寸, 堅不可碎.  

  술이기 잡서 치우일사에서 이르기를, 치우는 능히 구름과 안개를 만들었다. 탁록은 지금의 기주에 있다. 치우신은 민가에서 이르기를, 사람의 몸에 소발굽이며, 눈이 4개에 손이 6개이다.
  지금의 기주 사람들이 땅을 발굴해서 유골을 파내었는데, 그 유골이 구리나 쇠처럼 단단했다. 즉 치우의 뼈라고 했다. 지금 있는 치우의 이빨은 길이가 2촌인데, 단단하여 부수어지지 않았다.


  秦韓間說…蚩尤氏耳 劍戟, 頭有角, 與軒轅鬪, 以角 人, 人不能向.
  今冀州有樂名, 蚩尤戱, 其民兩兩三三, 頭戴牛角而相 . 漢造角 , 蓋其遺制也.
 太原村落間, 祭蚩尤神, 不用牛頭.
  今冀州有蚩尤川, 卽 鹿之野.
  漢武時, 太原有蚩尤神 見, 龜足蛇首, 抵疫, 其俗遂爲立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사이의 설에 의하면, 치우씨의 귀밑 터럭은 칼이나 창과 같다고 했으며, 머리에는 뿔이 있어 황제 헌원과 싸울 때 뿔로 사람들을 쳤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지금 기주에는 치우희(蚩尤戱)라는 놀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둘둘이나 삼삼으로 머리에 소뿔을 이고 서로 찌르는 놀이이다. 한나라 때 만들어진 각저도 모두 그 유물이다.
  태원 촌락간에는 치우신에게 제사지낼 때 소머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무제 때의 태원에 있는 치우신의 화상을 보면, 거북이 발에 뱀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역질을 막는다는 풍속에 따라 사당을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

 이 땅의 무지한 인간들은 치우를 악마로 만들었지만 중원의 백성들은 칭송하며 비를 세우고 사당과 동상을 세워주었네..
치우천황이 현세하여 이 모습을 지켜본다면 그의 마음이 어떨까!
필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림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치우의 혈맥은 고스란히 필자의 몸 속을 누비고 있기에 내 맘이 치우의 맘이리라...

                                        蚩尤直孫 破天荒 熊眞子 昊聖 姜錫泰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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